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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한 신앙




두 단어가 어떻게 보이시는지요? 서로 어울리나요? 아니면 붙어있기가 껄끄러운 단어일까요?


신앙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추구하는 방향은 분명 우리가 지금 있는 상태로 '안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신앙이 우리에게 어떻게 소개되고 다가와서 우리를 일으키고 움직이게 하는지에 있어서는 '부드러움' 혹은 '온유함'이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마태 11,29)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이 '편안한 신앙'을 이야기할 때, 혹은 다른 표현으로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는 식의 이야기를 할 때에 언급되는 그 편안함은 그 어떤 성장도 거부하는 상태, '나태'와 가까운 상태를 의미하기에 문제가 됩니다. 이는 어린아이가 학업을 거부하고 건강한 음식을 먹기를 거부하며 매일같이 몸을 상하게 하지만 자신의 입맛에 맛깔스런 해로운 음식을 먹고 머릿속을 텅텅 비우는 모양새와 비슷합니다. 그럴 때에 '편안한 신앙'은 독이 되고 맙니다.


신앙은 우리를 '희망'의 자리로 초대합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지금 우리가 지니고 있지 않은 무엇입니다. 우리가 흔히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은 여기에서 '완료'되지 않았습니다. '시작'되었을 수는 있지만 결코 완성되지 않은 무엇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달음질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경기장에서 달음질하는 사람들이 다 같이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르십니까? 여러분도 힘껏 달려서 상을 받도록 하십시오. 경기에 나서는 사람들은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월계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애쓰지만 우리는 불멸의 월계관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1코린 9,24-25)


그렇게 열심히 달리다보면 어느새 우리에게 '근력'이 비축되기 시작합니다. 즉 전에는 너무나도 힘들게 느껴졌던 길이 편안하게 다가오고 일상적인 행위로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더 높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크게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게 됩니다. 즉 우리는 '단련'되고 '훈련'되는 것입니다.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히브 12,11)


편안한 신앙은 절대로 신앙생활을 안락하게 하는 방법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거짓말이 됩니다. 신앙에는 분명한 목적지가 존재하고 우리는 그 방향을 향해서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움직여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 신앙에 초대되는 이들이 지레 겁먹고 의욕을 상실할 정도로 압박을 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 경우에는 신앙의 온유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초심자들을 부드럽고 서서히 배워 나갈 수 있도록 열심히 도울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되면 우리는 그 자리에 머물러서 기득권을 향유하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목표는 이 지상의 어느 지점이 아니라 영원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하루 우리를 훈련시켜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훈련이 하루하루 이어지면서 과거에는 힘겨움을 느껴졌던 일들이 훗날에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여겨지게 됩니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평화로움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렇게 준비된 이들을 더욱 성장시키기 위해 더 큰 일을 예비하십니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요한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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