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문화'로 시선을 돌려보자. 우리는 수많은 문화적 부흥기를 겪어왔다. 인간의 권리를 보다 더 확충해 왔고 모든 이가 평등한 시대로 나아가는 것 같다. 지금의 단계도 역시 '완성'된 것은 아니기에 앞으로는 또 어떤 변화를 겪을지 모른다. 과거에는 노예가 존재했고, 여성의 신분이 극적으로 달랐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문명이 발달한 곳일수록 그런 경향은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문화적 제도가 개선되지 않은 시대에도 복음이 존재했고 인간의 구원은 작동하고 있었다. 마치 자동차가 없어도 '이동'이 가능했던 것처럼, 문화적 개선 이전에도 '구원'은 여전히 열려 있던 주제였다.
인간의 발전을 멈추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현재의 불편을 반영해서 더 나은 쪽으로 끊임없이 바뀌어 갈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의 근저에 인간의 가장 기본에 해당하는 영역에 구원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요소가 바뀌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신앙에 신경쓸 수 없다'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마치 '전기 자동차가 없으니 나는 움직일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을 핑계가 넘쳐흐른다. 그리고 그러한 요소 가운데 사람들이 핑계를 대는 요소가 있다. 예를 들어, '교회가 콱 막혀서 내가 하느님께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는 식이다. 아니다. 지금보다 더 콱 막혀 있던 시대에도 사람들은 하느님을 찾아왔고 원하는 이는 생수를 마실 수 있었다. 아니, 지금보다 더한 핍박과 박해의 시대에 오히려 신앙인들은 구원의 꽃을 피웠다. 한국 교회 자체가 그 증거다. 우리는 피로 증거한 신앙 위에서 지금까지 나아온 것이다.
신앙의 여정이 순탄하리라 생각지 말자. 과거는 과거대로 지금은 지금대로, 또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는 그대로 수많은 문제가 함께 공존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원하는 이는 주님의 발치에서 그분의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명의 물을 마실 수 있다. 신앙생활은 인간의 본질과 연계된 것이고 환경의 지원 여부에 따라 달라지는 옵션이 아니다. 그러니 각자는 자신 앞에 놓인 하느님과의 관계에 성실하게 임해야 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