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주변에는 온갖 인물들이 들끓고 있었다. 일단 예수님이 당신의 기적들로 군중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킴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모두 예수님의 메세지를 올바로 이해하고 완벽하게 변화된 모습으로 산 것은 아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그러지 못했다. 제자들은 여전히 높낮이 다툼에 몸담기도 했고(누구에게 더 힘이 있는지를 다투는 권력 질서 중심의 보수성향), 또 그분이 로마에게 지배를 당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을 언제 뒤집을지 궁금해 하기도 했으며(상황의 획기적인 변화를 통해 현실을 바꾸어 보려는 진보성향), 거룩한 변모를 보고도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예수님을 지상에 붙들어 두려는 시도도 있었고, 막연한 시기와 질투로 끊임없이 공격을 당하기도 하셨다. 우리는 수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신앙적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세기가 달라지고 역사가 흐르면서 '껍데기'의 색깔만 바뀌었을 뿐 우리는 여전히 동일한 주제를 두고 서로 다투고 있다. 한쪽은 지키려고 하고 한쪽은 뒤집어 엎으려고 하는 가운데 우리는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복음의 진정한 메세지는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예수님은 과연 무엇을 의도하신 것인가? '하느님의 뜻' 말고는 다른 적절한 답이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이 하느님의 뜻은 '신비'에 가리워져 있다. 그러나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절대로 알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우리에게 열어보이는 만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절대로 완전히 파악해 낼 수는 없는 무엇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한계'를 설정해 두고 살기 때문이다. 공간적으로도 우리는 모든 지역에 동시다발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시간적으로도 한정된 시간 안에 묶여 있을 뿐이다. 대표적인 예로 우리는 후대의 자손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르는 채 지금의 것들을 잔뜩 소비해 버리고 심지어는 자녀 세대에게 그 결과가 가기도 전에 우리가 그 결과로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는 대표적 수단으로 '성경'과 '성전'을 말한다. 즉 성경 말씀 안에 당신이 의도하는 바를 이해하도록 뜻을 담아 두었고, 그것을 올바로 전하고 해석하는 능력을 성령을 통해서 '거룩한 전승'에 맡기신 것이다. 거룩한 전승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와 그 가르치는 권한이라고 할 수 있는 교도권이다. 하지만 이 성경과 성전을 근본적으로 작동시키는 분은 역시 하느님이신 거룩한 영, '성령'이시다. 즉, 성령을 바탕으로 성경이 쓰여지고, 또 같은 성령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그 거룩한 뜻이 풀이되고 이해되며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하느님의 뜻은 하느님의 힘으로 다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신앙을 저마다 제가 바라는 식으로 해석해 버리는 사람들이 넘쳐흐르고 있다. 누군가에게 신앙은 정치적인 '노선'일 뿐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심리적 안정을 보장하는 하나의 사회적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이 성령의 힘에 올바로 기대고 있지 못하다.
성모님에게 '받아들임'의 은총을 부어주시어 구원자를 잉태하게 하신 분, 세례자 요한을 광야로 이끌어 사람들에게 길을 준비하게 하신 분, 예수님의 공생활을 이끌어 가신 분, 교회를 세우시고 여전히 보살펴 주시는 분으로서의 성령, 우리는 성령에 온전히 마음을 열어야 한다. 그래야 바로 그 거룩한 영, 진리의 영, 위로자이신 분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게 된다. 모든 다양성을 획일적으로 통일하지 않고 그 각자의 고유함 속에서 일치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는 분, 우리는 성령을 청하고 받아야 한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신앙인으로서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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