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경험과 초월




오직 '초월'을 경험한 사람만이 한계를 벗어날 꿈을 꿀 수 있다.


우리는 모두 비슷비슷한 경험 속에서 살아간다. 비슷한 시대를 살면서 탄생하고 동시대의 물질문명의 혜택 속에서 비슷한 체험을 나눈다. 우리보다 조금 앞선 시대의 경험을 어른들을 통해서 듣게 되고 또 미처 우리가 생각지 못한 것을 발명해내는 후대의 세대에 감탄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전쟁을 겪지는 않았지만 그 경험을 공유하고 최신 개발된 물건과 또 앞으로 이루어질 발전상을 유투브 영상으로 알게 된다.


그럼에도 이런 모든 경험들은 유사한 범주 안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이 아무리 최신 기술을 뽐내고 문명의 발달을 이루어낸다고 해도 그것으로 인간이 진정 '초월'을 이루어 내었다고 볼 수는 없다. 설령 영원히 사는 약을 발명한다고 해도 그것이 인간 '초월'의 진정한 의미는 아닐 것이다.


인간이 진정으로 자신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자신을 뛰어넘은 존재의 인도가 필요하다. 그런 초월적 체험이야말로 인간을 자신이 머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 누구도 뛰어보지 못한 점프를 할 수 있게 도와준다. 신앙은 그것을 '부활'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은 부활을 단순하게 생각한다. 그저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는 정도로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리 미사와 성사 안에서 끊임없이 외쳐지는 '부활'에 대한 소식을 접해도 그 본연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세속적 부활에 대한 관념만을 얻을 뿐이다.


진짜 부활은 그 부활의 올바른 아이디어가 나로 인해서 구체적으로 실천될 때에 일어나는 일이다. 인간의 유한성을 넘어선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을 실천할 때에 사람은 진정 '부활'을 체험하게 된다. 이 세상 그 누구도 해보지 못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은 그를 더욱 상승세로 전환하게 된다.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쉽게 일상의 예를 비유로 들어 보겠다. 한 아이가 그림을 그린다. 이 아이의 '그림세계'는 종이와 연필, 그리고 물감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아이는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이라는 행위 자체를 전혀 다르게 해 본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연필 대신 목탄을 쓸 수는 있고, 만년필을 써 볼 수는 있어도 그 밖의 다른 행위가 그림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어느날 이 아이가 무형예술인의 공연을 보게 된다. 그는 커다란 종이를 깔아놓고서 그 위에 먹물이 묻은 신발로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의 춤사위가 바닥에 그림을 그려낸다. 이 아이는 그의 행위를 보고서는 깜짝 놀랄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자신이 지금껏 그려오던 행위와 전혀 다른 행위를 통해서 '그림'을 그리기 때문이다.


이제 집으로 돌아간 아이는 연필, 물감을 내려놓고 조심스레 손에 물감을 찍어본다. 손이 그림도구가 된다. 그리고 집 안에 있는 다양한 물건들로도 표현을 시작해본다.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 이제 이 아이에게는 현실이 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예시로 든 비유일 뿐이다. 그러나 '초월'이라는 것이 우리의 틀을 어떻게 깨는지를 보여주는 비유이다. 종교인들은 여전히 세상에 묶여 있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진정한 의미의 초월적 체험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항상' 열려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님은 부활하신 분이고 지금도 살아계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경험은 실제로 눈으로 보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감각기관으로도 경험을 하고 또 '영혼'으로도 경험을 한다. 우리의 오감이 모두 잠들어 있을 때에도 우리는 수면 중에 '꿈'을 통해 경험을 할 때도 있다. 꿈 안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보고 듣고 느끼기도 하지만, 꿈 자체가 우리에게 전하는 의미를 고스란히 지니고 깨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영혼은 오감이 전해주지 못하는 영역의 것을 캐치할 수 있고 그것을 나의 고유한 경험으로 살려낼 수 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그저 문자를 공허하게 발음할 수도 있지만 그 안에 살아 숨쉬는 성령을 믿음으로 체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초월에 대한 경험이 인간을 진정한 구원으로 이끌어간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