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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024의 게시물 표시

열매

농부가 땅을 경작했다고 해서 그 땅 자체를 열매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열매는 그 땅에서 생산된 것을 말합니다. 원래는 그 땅에 없던 것, 하지만 그 땅에서 생겨난 것을 열매라고 합니다. 바로 이런 의미로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됩니다. 모든 자연은 하느님께 순응하는 하느님의 도구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 내면의 자유 의지 안에서 말씀을 받아들여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선'을 선택함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비추어 내는 훌륭한 열매를 생산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습니다. 오늘도 주일을 맞이해서 수많은 본당에서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반항하는 마음을 지니고 듣지도 않을 뿐더러 설령 듣는다 하더라도 그저 듣기만 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바꾸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들은 바를 실행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무언가를 실행하고는 있습니다. 자신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실행하고 있습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고 돈이 필요하면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를 위해서 상당히 바쁩니다. 하지만 그 실행은 바람직한 신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야 합니다. 요즘 세상에 고아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하지만 고아가 의미하는 것은 아버지를 잃은 이들을 의미합니다. 현대인들은 참된 아버지인 하느님을 잃은 이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그것이 그들을 영적으로 돌보는 일입니다.  과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을 잃은 아내들을 돌보라는 단순한 의미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영혼의 의지가 되는 신앙을 상실한 이들을 돌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현대의 수많은 사람들은 과학을 신봉하면서 영혼의 거처를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습니다. 사주를 보고 점을 보고 타로를 보면서 의지할 곳을 찾고자 합니다. 그런 이들에게 참된 신앙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 교

단순한 계명

첫 인간에게 주어진 계명은 하나 뿐이었습니다. 누구나 알아듣기 쉽게 쓰면 '너희는 하느님인 내 말을 들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선조는 바로 이 첫 계명을 어겼고 그 이후로 계명은 복잡성을 더해가기 시작합니다. 사실 이러한 상황은 우리 일상에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엄마 말을 잘 듣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다른 것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점점 지력이 늘어가고 행동반경이 넓어지면서 이런 저런 것을 건드리면 그때부터 '하지 말라'는 것이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더러운 손으로 밥 먹지 말아라.' '전선은 건드리지 말아라.' '공공장소에서 떠들지 말아라.'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지 말아라.' 아이들의 가능성이 커지면 커질수록 하지 말라는 범주도 점점 늘어나게 마련입니다. 할 수 있다고, 가능하다고 해서 모든 것을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할 수 있어도 해 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조심하라'라는 한 마디면 끝날 일들이 이런 것도 해 보고 싶고 저런 것도 해 보고 싶은 마음에 자꾸 세부 명령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같은 식으로 계명의 복잡성도 늘어납니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계명의 근본에는 동일한 의지가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명하시는 것을 잘 지키라'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도 우리 교회는 수많은 계명들이 있지만 그 계명의 근간은 동일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깨어있는 사람이 되면 사실 계명의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훗날 영원 안에서 하느님은 '너는 미사 시간 몇 분에 도착했느냐?', '너는 금육일에 소고기가 들어간 국물을 떠먹었느냐?'와 같은 것으로 우리를 조목조목 비난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미 우리의 내면 속에 들어 있는 근원적인 의지를 알고 계시고 바로 그것으로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위선 - 선을 위장하다

155미리 포병 훈련 가운데에서 여러가지가 힘이 들지만 의외로 성가시고 힘이 드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바로 포를 다 전개하고 마지막으로 '위장막'을 치는 것입니다. 애써 포를 방열을 했는데 적군에게 그 즉시 들켜 버리거나 적 항공기에게 들켜서 폭탄을 맞아 버리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포를 거의 대부분 덮는 넓은 위장막을 포 위로 얹어서 포를 열심히 숨겨야 했습니다. 상대를 완전히 박살낼 정도로 무서운 무기가 안에 숨어 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무해한 풀숲이 있는 것처럼 숨기는 것입니다. 신앙의 영역 안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사실은 모두를 파괴할 요소를 품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위장막을 치고 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위장막은 다른 이에게 '선한 사람'으로 보이는 위장막입니다. 마치 하느님에 대해서 잘 알고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인 양 거짓된 선으로 자신의 겉을 둘러싸는 것입니다. 1독서에서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누가 예언이나 설교로 또 우리가 보냈다는 편지를 가지고 주님의 날이 이미 왔다고 말하더라도, 쉽사리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누가 무슨 수를 쓰든 여러분은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2테살 2,2-3) 누군가의 권위에 기대어 엉뚱한 것을 복음이랍시고 선포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자신이 교리 신학원을 나왔다느니 교회의 중요 인사와 잘 안다느니 하는 식으로 교회 안에서 나름의 권위가 있다는 것을 눈에 보이는 표지로 대신하면서 정작 사람들의 마음에 하느님의 참된 복음이 아닌 '공포'에 기인하는 지배력을 펼치려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이 역시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거룩함의 표지로 흔히 받아들여지는 요소, 외적이고 형식적이기만 한 신앙의 외적 틀, 사람들의 눈에 띄는 값비싼 봉헌 등의 행위로 실질적인

바싹 마른 뼈와 같은 가르침

우리는 척추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모든 뼈들이 그 중심을 바탕으로 자리를 잡아 나갑니다. 교회의 가르침에도 그 핵심이 존재합니다. 그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거기에 다른 뼈를 붙여 나가고 살을 붙여 나가면 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가 바라보고 있는 '뼈'들은 우리 교회가 가르치는 수많은 핵심 가르침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싹 말라 사방에 흩어져 있습니다. 완벽히 죽은 것처럼 보이고 회생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이 바싹 마른 뼈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알고 계십니다. 그것이 어떻게 다시 살아있는 존재로 변모하게 되는지 하느님은 잘 알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명령 대로 예언자가 예언을 하자 뼈가 붙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힘줄과 살이 올라오고 살갗이 덮이게 됩니다. 마침내 하느님은 그렇게 되살아난 존재에 마침내 당신의 숨을 불어 넣으십니다. 현대 사회를 보노라면 마치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신앙과 그 가르침은 바싹 메말라가고 갈수록 사람들은 더 줄어들며 희망은 사라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그렇지만 하느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그 뼈들에게 명령하면 그 뼈들이 되살아날 것입니다. 다만 그렇게 하는 데에는 당신의 명을 받들어 '말씀'을 선포하는 이들이 필요합니다. 바로 우리가 그 주인공들입니다. 우리가 다시 하느님의 말씀을 품고 살아가고 하느님의 명령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애를 쓰면 바로 우리를 통해서 교회가 되살아나게 됩니다. 교회는 제3의 어떤 존재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교회의 일원, 즉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닙니다. 다만 오늘날에는 모든 것이 혼란스럽게 느껴집니다. 이런 때일수록 '말씀을 실천하는 이들', 즉 뼈를 붙이고 살을 붙여 말씀을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다 - 신자들의 이득을 취하고 그들에게서 명성을 얻고자 함. 살진 놈을 잡아먹다 - 믿음이 튼실하던 이의 믿음을 해체함, 인도자의 그릇된 모범으로 신앙을 세속화함. 양 떼를 먹이지 않음 - 신앙인은 참된 신앙으로 성장하는데 그 적절한 양식을 주지 않음. 야픈 양을 고쳐 주지 않음 - 유혹과 죄라는 질병에 시달리는 양에게 적절한 신앙적 조치를 취해주지 않음.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림 - 직무 사제직의 왕권의 본질적 의미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영적인 헌신이고 봉사임. 하지만 이를 세속적 의미로 해석하면 동네 권력가, 즉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다스림을 하는 사목자가 됨. 목자가 없어서 흩어짐 - 사제의 내면에 성령을 모시고, 예수님을 참 목자로 섬기고 있어야 함. 예수님이 없을 때에 주님을 찾는 양들은 흩어짐. 반대로 세속성을 사랑하는 이들은 도리어 모여들기 시작함. (술꾼  주변에는 술 좋아하는 이들이 모여드는 식)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됨 - 교회에는 세속성을 지닌 이들이 적지 않음. 그들은 항상 먹잇감을 찾아 다니고 그 가운데 가장 손쉬운 먹잇감은 목자가 없는 양들, 즉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에게서 양식을 얻어야 하는데 굶주리고 있는 양들임. 이들은 세속성이 가득한 신자들의 이간질에 휘둘리고 그들읭 유혹에 넘어가 엉뚱한 싸움에 휘말리기 쉬움. 산마다, 높은 언덕마다 양 떼가 길을 잃고 헤맴 - 세상의 여러가지 목적지가 산과 언덕을 형성함. 주님을 찾지 못한 양들은 엉뚱한 목적에 매달리기 시작함. 세속적 신앙 목표에 매달려서 엉뚱한 신심 행위에 시간을 보내고 있음.

진가를 발휘할 때

모든 것은 저마다의 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때가 오기 전까지는 그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명조끼는 바다에 빠질 때에야 그 진가를 발휘합니다. 그 이전에는 그것이 그저 귀찮고 성가실 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생을 마무리하고 영원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신앙은 그때에 진가를 발휘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신앙은 귀찮고 성가신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더 향유하고 싶은데 그것을 방해하고 자꾸만 내가 하기 싫은 무언가를 강요하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결국 생은 마무리 될 것이고 그때에야 신앙이 진가를 발휘할 것입니다. 미리미리 준비를 해 둔 사람이라면 그 가치를 만끽하겠지만 뒤늦게 부랴부랴 등불을 챙겨든 사람이라면 하느님의 자비에 맡겨질 뿐입니다. 물론 신앙이 최종적인 영역에서만 가치를 발휘하지는 않습니다. 신앙은 우리의 현세의 삶의 내적인 질을 드높이는 데에도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참된 신앙이 있는 사람은 세상의 작은 기쁨을 더 소중히 여길 줄 알고, 또 허황한 것들을 사전에 차단해서 예방할 줄도 압니다. 지금 다가오는 쾌락을 즐기기 위한 수많은 수단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은 우리가 그러한 것을 미리미리 조심하게 해서 그 쾌락 이후에 다가오게 될 수많은 부정적인 결과를 사전에 예방하는 역할을 합니다. 어린 시절에 신부님 곁에서 복사를 선 친구는 다른 친구들과 즐길 수 있는 시간을 잃을 지 모르지만 다른 한편으로 허황한 즐거움에 빠져들 위험에서 보호받는 것이기도 한 셈입니다. 사실 신앙이라는 것 자체가 보이지 않는 영역에 근거합니다. 현세의 시각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 다만 계시의 진리가 우리에게 약속하는 것을 바탕으로 신앙을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먼 훗날, 우리는 세상의 감각을 벗어버리고 지금의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신앙은 그 감추어 두었던 빛을 발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여인과 교회

묵시록에서 나오는 여인은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나타내기도 하고 그와 동시에 그 딸인 교회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오늘 묵시록의 말씀을 곰곰이 묵상하면 현대 교회가 처해 있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늘에 나타난 표징은 우리에게 드러난 완성된 교회상을 나타냅니다. 이 교회는 태양으로 대변되는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있고 또 발 밑에는 정화의 과정에 있는 교회, 세상에 빛을 보내긴 하지만 태양빛에 비할 수 없는 빛을 주는 달을 두고 있습니다. 머리에 놓여진 관은 구약의 하느님의 백성인 열 두 지파를 이어받은 열 두 사도의 아름다움을 나타냅니다. 무엇보다도 완성된 교회상을 대변하는 분으로 우리는 성모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우리 신앙의 모범이고 교회의 어머니이십니다. 하지만 이 교회의 찬란한 외모와는 달리 교회는 지금 아기를 배고 있습니다. 아직 하나의 인간으로 성장하지 않은 미숙한 존재를 품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 아기가 세상에 완전한 존재로 태어나기까지 여인은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부짖습니다. 현대 교회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품고 있고 이들이 교회 안에서 충분히 성장하고 온전한 하느님의 자녀들로 완성되기까지 갖은 애를 쓰며 돌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늘에서 등장하는 다른 표징이 있습니다. 규모에서 압도적이고 색깔은 피와 죽음, 시련을 상징하는 붉은 색입니다. 무엇보다도 '용'이라는 과거부터 무시무시한 존재로 인식되어 온 모양새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놈은 머리가 일곱입니다. 머리는 영리함을 나타내고 그 일곱 머리는 악을 위해 헌신하기 때문에 영악함이 됩니다. 뿔은 찌르고 억압하고 짓누르는 권력을 의미합니다. 그 머리들 가운데에 7이라는 충만한 숫자로 대변되는 머리들은 작은 관으로 대변되는 세상에서 충분한 권세와 영예를 향유한 이들을 대변합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세상을 짓누르고 억압하는 세력은 언제나 최고의 위치에서 권력과 명예를 누리며 힘 없는 이들을 짓밟고 있습니다. 이는 인류 역사가 존재하는 내내 있어왔던 일입니다. 이 용은

악은 선을 싫어한다

선은 악을 보면서 부정적인 감정을 느낍니다. 그리고 악은 반대로 선을 보면서 비슷한 감정을 느낍니다. 선과 악이 만나는 곳에는 상호 간에 부정적인 감정이 맴돌게 됩니다. 뇌물을 주려는 사람은 청렴하려는 사람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느낍니다. 뇌물을 주고 서로 뒤를 봐줘야 일이 수월하게 처리되는데 이 사람은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나빠집니다. 하지만 '악'은 뇌물을 주려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기분을 나쁘게 하는 사람이라고 무조건 나쁜 게 아닙니다.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를 올바로 식별해야 합니다. 어린 아이가 과한 욕심을 부려서 몸에도 좋지 않은 음식을 먹겠다고 떼를 쓰고 엄마는 단호하게 그것을 말리고 있는데 아이는 엄마에게 '나쁘다'고 악을 씁니다. 자신이 욕구하는 것을 못하게 가로막는 엄마가 야속하고 나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엄마가 나쁜 게 아닙니다. 아이의 과한 욕심이 그릇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잡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식별이 없으면 엄마가 나쁜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말씀에는 '비탄과 탄식과 한숨'이 적혀 있습니다. 하느님은 선이고 우리를 빛으로 이끄시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은 괴롭게 느껴집니다. 또한 그런 이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이들도 비슷한 감정을 느낍니다. 어둠에 있는 이들을 빛으로 이끄는 과정이 쉬울 거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사람들은 거부할 것이고 반대할 것이고 심지어는 비난하고 험담하고 없는 죄까지 만들어 덮어 씌울 것입니다. 하지만 예언자의 입에 하느님의 말씀은 달콤합니다. 예언자는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는 데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가 받아먹는 말씀은 너무나도 달디 달아 마치 꿀처럼 입에 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말씀을 먹여 주시는 이유는 가서 전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가 가서 전할 때에 '비탄, 탄식, 한숨'이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하는 '작은 이들'

빵 먹는 법

빵 먹는 법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 간단한 일입니다. 입에 집어넣고 씹으면 됩니다. 하지만 영혼의 빵은 어떻게 먹을까요? 여기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미사에 오면 빵을 줍니다. 물론 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할 정도로 작은 빵이지만 그건 현대의 사목 환경에 따라 변화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줄어든 것이고 옛날에는 정말 빵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미사에 오면 배불리 빵을 먹기도 했습니다. 육체를 먹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습니다. 빵이 있으면 먹으면 그만이니까요. 하지만 이 빵의 본질을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는 과거나 현대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만큼 영혼이 빵을 먹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배움이 필요한 일입니다. 빵은 입으로 먹는 것처럼 영혼도 외부에서 주어지는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입'의 역할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소식을 전할 때에 우리가 그 사람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그가 하는 말 가운데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상대에 대해서 신뢰가 존재하는 사람, 즉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것입니다. 이처럼 신뢰, 믿음은 상대가 전해 주려는 내적인 것을 받아들이게 하는 훌륭한 수용체, 즉 영혼의 입이 됩니다. 따라서 생명의 빵은 비록 우리의 몸에 달린 입으로 먹지만, 사실 영혼의 입으로 먹어야 하는 빵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고 그분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기 위해서는 그분과 친교를 쌓아야 하고 그분이 진실된 분이라는 것을 확인해 나가야 합니다. 바로 그 믿음이 영원한 생명의 빵을 먹게 만들고 우리에게 그 빵의 효과를 보게 만들어 줍니다. 현대에는 믿지 않는 이들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빵을 아무리 먹어도 몸으로만 받아들여지고 영혼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교회가 갈수록 쇠퇴합니다. 교회의 위기는 세상의 구조

성령을 슬프게 하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분명히 성령의 인장을 받습니다. 우리에게는 성령이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 선한 일이고 무엇이 악한 일인지 알고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혼 도장 찍었다고 바람피우지 말라는 법이 없듯이, 이런 우리들이라고 해서 악을 저지르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악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건 바로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이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원한 이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극단적인 하나의 증상은 밤에 잘 자는가 하는 것입니다. 원한을 품고 있는 자는 그 꾸준한 내면의 증오로 인해서 잠을 설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위와 관련해서 병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격분 폭발하는 분노를 말합니다. 마치 풍선이 작은 바늘 하나에 터져 버리는 것처럼 그 내면에 응축되어 있는 분노를 가지고 있다가 폭발시켜 버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 주위에서 사실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되는 케이스이기도 합니다. 뭔가 일이 잘 안풀리고 그것을 스스로 해소해 나가지 못하는 이에게서 쉽게 드러납니다. 특히나 현대 사회는 삶의 소소한 영역에서 쌓아놓은 화를 격분을 통해서 드러내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분노 분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분노는 불의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정당한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는 분노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통상적인 분노는 '의로움'에 기반한 분노이기보다도 내가 당하는 섭섭함에서 기인하는 분노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됩니다. 정말 선과 사랑을 수호하기 위해서 필요한 하느님의 의로운 분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자나 부모 자녀에게 가지는 섭섭함에서 기인하는 분노입니다. 이는 이기적 분노이고 죄가 됩니다. 폭언 우리는 대화를 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서로 그릇되이 생각하는 일이 있을 때에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경우에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일이 잦습니다. 폭언이라고 '고함' 지르는 것만 연상해서는

일어나 먹어라

충분함의 선택은 하느님의 몫입니다. 미숙한 이는 자신의 상태에 대한 점검을 바르게 하지 못합니다. 어느 정도의 사탕을 먹어야 적당한지 어느 정도의 힘든 상황을 내가 견딜 수 있는지 아이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무작정 사탕 그릇에 있는 사탕을 다 주워먹어 버리기도 하고, 또 높은 나무에서 무모하게 떨어지다가 다리를 부러뜨리기도 합니다. 우리의 생은 언제 마무리 되어야 할까요?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우리는 힘들 때는 그만 멈추어 달라고 하고 좋을 때는 이 순간이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의 생의 주도권은 하느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충분한지 아닌지를 아십니다. 나아가 우리의 삶은 우리 자신의 개인적 이득과 연계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섭리 안에서 살아가고 우리의 섭리는 타인의 구원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신앙을 가진 부모님은 자녀들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의 생의 여부가 결정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자녀들에게 '사랑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 부모에게 고난의 시간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수많은 성인들은 타인에게 줄 수 있는 영향력 때문에 지상에서 이미 마치고 싶은 삶을 계속해야만 했습니다. 천사는 먹으라고 합니다. 물론 우리의 육신은 음식을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천사가 주려는 빵은 '의지'의 빵입니다. 그리고 아직 할 일이 남았음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합니다. 사람의 내면에 작용하는 의지의 음식, 즉 은총은 그를 상상하지 못할 일을 하게 도와줍니다. 엘리야는 하룻길을 걸어 광야에서 죽을 것 같았는데 천사가 주는 빵을 먹고는 사십 일을 걸어갑니다. 물론 사십이라는 숫자는 언제나 정화의 시간, 참회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지상의 삶을 살면서 때로 많은 경우에 '삶'을 즉, 선을 향한 의지를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세상이 너무나 악하고 영리해서 그들의 꾸준한 공격에 의지가 무너질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에게 은총의 양식을 먹이시고 우리는 그 힘으로 이 시간을 견뎌낼 수 있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