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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과 교회




묵시록에서 나오는 여인은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나타내기도 하고 그와 동시에 그 딸인 교회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오늘 묵시록의 말씀을 곰곰이 묵상하면 현대 교회가 처해 있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늘에 나타난 표징은 우리에게 드러난 완성된 교회상을 나타냅니다. 이 교회는 태양으로 대변되는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있고 또 발 밑에는 정화의 과정에 있는 교회, 세상에 빛을 보내긴 하지만 태양빛에 비할 수 없는 빛을 주는 달을 두고 있습니다. 머리에 놓여진 관은 구약의 하느님의 백성인 열 두 지파를 이어받은 열 두 사도의 아름다움을 나타냅니다. 무엇보다도 완성된 교회상을 대변하는 분으로 우리는 성모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우리 신앙의 모범이고 교회의 어머니이십니다.


하지만 이 교회의 찬란한 외모와는 달리 교회는 지금 아기를 배고 있습니다. 아직 하나의 인간으로 성장하지 않은 미숙한 존재를 품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 아기가 세상에 완전한 존재로 태어나기까지 여인은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부짖습니다. 현대 교회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품고 있고 이들이 교회 안에서 충분히 성장하고 온전한 하느님의 자녀들로 완성되기까지 갖은 애를 쓰며 돌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늘에서 등장하는 다른 표징이 있습니다. 규모에서 압도적이고 색깔은 피와 죽음, 시련을 상징하는 붉은 색입니다. 무엇보다도 '용'이라는 과거부터 무시무시한 존재로 인식되어 온 모양새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놈은 머리가 일곱입니다. 머리는 영리함을 나타내고 그 일곱 머리는 악을 위해 헌신하기 때문에 영악함이 됩니다. 뿔은 찌르고 억압하고 짓누르는 권력을 의미합니다. 그 머리들 가운데에 7이라는 충만한 숫자로 대변되는 머리들은 작은 관으로 대변되는 세상에서 충분한 권세와 영예를 향유한 이들을 대변합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세상을 짓누르고 억압하는 세력은 언제나 최고의 위치에서 권력과 명예를 누리며 힘 없는 이들을 짓밟고 있습니다. 이는 인류 역사가 존재하는 내내 있어왔던 일입니다.


이 용은 목적 없이 거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용은 하늘의 별을 공략하고 무너뜨리기 위해서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최종목적은 태어나는 하느님의 자녀들, 즉 여인이 해산의 고통으로 품어 안고 있는 아기입니다. 그 아기들은 바로 우리 자신들, 곧 신앙인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는 언제나 세상의 온갖 똑똑함을 지닌 용이 우리를 유혹하려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침내 여인은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 첫 맏아들은 바로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그 뒤로 줄줄이 그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탄생합니다. 여인의 아이는 하느님께로, 그분의 어좌로 들어올려지고 그분을 따르는 우리들도 같은 운명을 겪게 될 것입니다.


여인은, 교회는 광야로 달아나야 합니다. 광야는 궁궐은 아니지만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처소가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현대 교회는 광야로 가야 합니다. 그곳에 하느님의 처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대 교회는 궁궐을 찾으려 합니다. 그곳은 용이 공격하려고 노리는 곳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늘의 목소리가 말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제 우리 하느님의 구원과 권능과 나라와 그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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