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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는 이들과 잃는 자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은 바깥 어둠 속으로 쫓겨나,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마태 8,11-12)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하늘나라의 상속권이 있다고 막연히 믿어오던 이들은 밖으로 쫓겨나게 될 것이고 반대로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이들, 너무나 먼 곳에 머물러 있어서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이들이 다가와서 잔칫상에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일은 반드시 그렇게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누차 경고했고 미리 밝히 드러내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당신의 이 말에 큰 심각성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 자신들이 생각하는 ‘중요한 일들’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의 초대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제단 가장 가까이 머무르면서도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만의 잔치에 골몰하고 있었지요. 저마다의 잇속을 챙기기에 바빴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영혼을 원한다는 것은 전혀 생각지 않았습니다. 

반면 자신들이 처한 괴로운 현실 때문에 하느님의 손길을 간절히 바라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찾고 또 찾았습니다. 현실의 여러가지 장벽들이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지만 그들은 하느님을 원했고 그분에게로 다가서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당신의 은총을 그들에게 전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은 살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게 되었고 나아가 상속자들이 되었습니다.

백인대장은 로마인이요 유다의 전통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지만, 소중한 존재를 알아보는 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의 능력을 그대로 보고 믿었고 또 적용할 줄을 알았습니다. 반면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입 안에 용서의 상징 그 자체인 성체를 모시면서도 사람들을 증오하고 용서하지 못합니다.

수많은 이스라엘 군중들은 매일같이 예수님의 곁에 머무르고 그분을 쳐다보고 심지어는 스쳐 지나가기까지 했지만 그분의 본질적인 가치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미 얻은 것을 잃게 되었습니다. 반면, 그분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누구든지 하늘 나라를 얻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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