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상시적으로 받는 은총이 있고 우리가 특별한 기회에 받는 은총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숨쉬고 살아갈 수 있는 바탕을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것은 모든 이가 똑같이 상시적으로 받는 은총이지만, 특별한 성사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은 그 특별한 상황으로 지금은 언제나 원하기만 하면 성체를 모실 수 있고 고해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역으로 그러한 성사들의 가치가 더욱 하락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좀처럼 성체 신심과 고해성사에 대한 신심이 돈독한 이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일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문명의 이기가 더욱 편리해지고 원하기만 하면 언제라도 주변 성당에 갈 수 있지만 그것을 귀찮아하고 있는 형편이지요.
그러나 예로부터 우리가 이러한 성사의 은혜를 늘상 입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성사는 귀한 것이었습니다. 아니, 사제 자체가 귀했습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열망이 존재했고 그래서 그런 성사의 기회가 올 때에 다시 없을 기회로 보고 온 마음으로 그 성사를 받아 들였고 그로 인해서 주어지는 은총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가톨릭 교회가 지닌 7가지 성사는 정말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흐름과 맥락을 같이 하여 가장 귀한 순간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지나친 신심은 오늘날 지나친 성사의 과부하로 이어졌고 이로 인해 사람들은 그 특별한 기회를 하나도 특별하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을 꾸짖기 시작하십니다.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1,23-24)
과연 우리는 어떨까요? 지금 우리가 일상적으로 입고 있는 미사의 은총을 가난한 나라, 선교사가 한 달에 한 번 겨우 찾아갈까 말까 하는 고을들에 기꺼이 나누어 줄 수 있었더라면 그곳에서는 엄청난 영적 부흥이 일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순히 성사 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서 우리가 하느님을 마주할 수 있는 기회들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우리의 마음은 ‘회개’를 체험하지 못합니다. 무엇이 회개인지 감도 잡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저 미사를 안나오다가 겨우 다시 미사를 나오는 것을 두고 회개라고 부르고 있지는 않은지, 진정한 내적인 돌이킴, 선을 향한 추구, 하느님에게로 되돌아가는 모습은 크게 내비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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