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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거리를 찾아서



기근이 온 땅에 퍼지자, 요셉은 곡식 창고를 모두 열고 이집트인들에게 곡식을 팔았다. 이집트 땅에 기근이 심하였지만, 온 세상은 요셉에게 곡식을 사려고 이집트로 몰려들었다. 온 세상에 기근이 심하였기 때문이다. (창세 41,56-57)

세상에 기근이 심해질 때 사람들은 먹을 것을 찾아 나아옵니다. 그리고 그 먹을 것은 ‘요셉’이 들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세상에는 먹을 것이 풍족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꼭 입으로만 음식을 먹는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사람에게는 여러가지 종류의 먹을 것이 있으니 정보도 습득하고 감정적인 위안도 찾게 마련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로서 ‘영적인 음식’이 존재합니다.

인간의 영혼은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라는 것은 오직 하나의 원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이지요. 그래서 이 배고픔을 느끼는 이들은 하느님을 찾게 되고 하느님을 지니고 있는 이들을 찾아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지요. 그런 이들을 받아들이고 감싸 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사랑의 먹을거리, 즉 하느님의 계명과 가르침, 그분의 사랑을 충분히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이 본래의 목적을 올바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자꾸 세상에서 먹던 음식을 먹이려 하지요. 온갖 재미나고 흥미를 끄는 활동으로 교회를 치장하려고 합니다. 명칭만 ‘성지순례’를 붙여서 세상 어디나 다 가는 야유회를 가고 명칭만 ‘주일학교’라는 이름을 붙여서 세상이 다 하는 흥미거리를 전해주지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분의 가르침의 핵심인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올바로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는 지친 삶을 벗어버리는 방법을, 그리고 온유하고 겸손한 그분의 멍에를 메고 올바로 사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제대로 먹이실 수 있는 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서 그분의 곡식 창고에서 음식을 받아 먹어야 합니다. 바로 미사 안에서 주어지는 그분의 거룩한 몸을 우리는 받아 먹고 마셔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야 우리는 배를 채울 수 있게 되고 비로소 올바로 서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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