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악은 하느님께서 주신 아이였습니다. 도저히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나이에 태어난 분명한 하느님의 기적과도 같은 아이였지요. 그리고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 바로 그 아이를 다시 내어 놓으라고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분명한 인식, 하느님의 전능과 자비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결여된 요즘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고 그분의 선과 자비에 대해서는 더더욱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이 필요할 때에만 찾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필요’라는 것은 자신의 욕구입니다. 즉, 하느님을 저마다의 욕구대로 휘어 잡으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착각합니다. 하느님을 올바로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으면서 그분을 나름으로는 열심히 믿고 있다고 착각하지요. 그러나 그 착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됩니다. 즉, 그에게 소중했던 무언가가 손해를 입을 때에 드러나는 그의 반응으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돈이 소중했던 사람, 건강이 소중했던 사람, 명예가 소중했던 사람, 권력이 소중했던 사람들의 모든 실체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욕구가 하느님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채워지니 잠시 마음을 둔 것 뿐이지요. 그들은 결국 자기 자신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하려고 할 때에 그 주변에 서서 소위 하느님을 사랑한답시고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하던 율법 학자에게 예수님은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고 있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위해서 그런 생각을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 생각은 악한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교회 안에서도 많이 일어납니다. 소위 성당에 열심하다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위해서 이런 저런 일들을 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증오하고 미워하고 의심하고 이간질할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봉사한답시고 성당에 와서 살다시피 하긴 하는데 결국 바로 그 봉사 때문에 마음을 어지럽히고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러 오신 분이시지 심판하고 벌주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헌데 그런 주님의 선한 마음을 넘어서서 우리 마음은 심판하고 벌을 주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마음이 악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이 올바로 정돈되지 않은 우리들입니다. 무엇을 믿어야 할지, 믿는다는 것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헛된 믿음을 쌓아오고 그것이 도리어 우리 스스로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 키웠다고 생각하는 이사악을 도로 바쳐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원래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벌써 우리의 몫으로 삼았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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