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라는 것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나온 것입니다. 하느님은 찬미가 필요하지 않으나 찬미를 드리는 것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전례라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에게 어떻게든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싶은데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까 하는 필요에 의해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구하신 것은 함께 모여 하느님께 감사 드리면서 빵과 포도주를 마시면서 당신 자신을 기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단순하고 소박한 행위였지요. 하지만 그분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져가기 시작했고 그래서 예식 중에 그분의 말씀을 되뇌이기 시작했으며 또 역사의 흐름에 따라서 ‘이렇게 하면 더 예의바를 것이다’라는 행동들이 덧붙여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현대의 전례를 가지고 있지요.
그 가운데 ‘한국적인 전례’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외국에서는 제대에 인사를 드릴 때에 한쪽 무릎을 꿇지만 한국에서는 ‘절’을 합니다. 그 밖에도 소소하게 한국적인 요소들이 여러 성사와 축복 예절 속에서 드러납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바로 ‘연도’가 있겠지요. 외국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한국 만의 고유한 풍습입니다.
헌데 이런 더해짐이 때로는 ‘도를 넘어서는’ 경우도 있습니다. 즉, 각 본당마다 자신들의 해석에 따라서 더해지는 것들이지요.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때로는 사람들의 숨통을 틀어막기도 합니다. 이건 이 자리에 있어야 하고 저건 저 자리에 있어야 하고 이 예식은 반드시 해야 하고 저런 행위는 반드시 전례 중에 끼워넣어져야 한다는 식이지요.
헌데 그 근거자료를 찾아보면 사실은 딱히 필요치 않은 행위들을 억지로 끼워 넣은 경우가 많습니다. 복사단이라고는 4명 밖에 없는 본당에서 매일매일 복사를 세운다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마을 주민이라고는 허리가 구부정한 어르신들 밖에 없는 곳에서 이런 저런 전례를 모두 채우기 위한 봉사자를 찾기란 쉽지 않은 것입니다.
핵심은 감사와 찬미 그리고 기념입니다. 우리는 전례 중에 이러한 것들을 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나머지를 꾸밀 수도 필요하다면 제외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례의 소소한 준비물들과 행위들을 모두 채우느라 정작 감사하지도 찬미하지도 예수님을 기억하지도 못한다면 그 전례는 지독히 형식적이고 격식적인 것이며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죽은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안식일 규정을 넘어서서 행동하신 예수님입니다. 헌데 오늘날 우리는 사람을 죽여가면서도 안식일 규정을 지키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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