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마태 10,40-42)
때로 자신의 인맥을 과시하면서 어느 신부님이 자기 집에 자주 들른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헌데 그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신부님과 함께 하느님의 길을 모색한 것이 아니라 그 신부님이 밤중에 스스럼없이 쳐들어 와서는 술을 진탕 먹고 가고 함께 고스톱을 치고 간다는 식이지요. 그리고 자매님의 버전을 들어보면 그 술자리의 안주를 준비하거나 아니면 신부님이 좋아하시는 음식을 마련한다고 신경 많이 썼다는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과연 그러한 이야기 안에는 사제를 사제로 맞아들였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자신과 엄청 친한 친구가 ‘사제’더라는 이야기를 하는 걸까요?
단순히 상대의 신분이 엄청나다고 해서 그를 그 신분의 본래의 위치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향에 가셨을 때에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언자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내면 안에 사로잡힌 ‘선입견’의 벽과 ‘교만’의 벽을 깨부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이는 성지순례를 갈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이 됩니다. 정말 성지순례를 그 의미 그대로 성지를 순례하기 위해서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관광’의 또다른 좋은 명목으로 가는 사람이 있지요. 그런 이들은 갈 때는 엄청 거룩하고 진지한 듯이 보이지만 올 때는 모든 것을 풀어제끼고 놀아야 속이 시원해지는 사람들입니다. 과연 그들이 올바른 성지 순례를 했더라면 오히려 갈 때 보다 올 때에 더 하느님을 마음 속에 품고 거룩한 기쁨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그러한 것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는 반대로 사제나 수도자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떠한 모습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것일까요? 사제로서의 모습일까요? 아니면 어느 기업 CEO의 모습일까요? 사제는 하느님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제이기 때문이죠. 사제는 가르치고 거룩한 성사를 집전하고 봉사하는 모습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바로 예언직, 사제직, 왕직을 수행하는 모습이지요.
하지만 사제가 그러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단순히 하나의 기능인이거나 어느 집단의 행정적 대표자, 혹은 책임자이기만 하다면 거기에는 뭔가 상당히 중요한 것이 빠져있는 상태가 됩니다. 사제는 무엇보다 영적 아버지입니다. 영적 아버지는 자녀들을 하느님께로 이끄려는 노력에 매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상황이 좋든 나쁘든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사제를 길러내는 것은 결국 ‘평신도’라는 자양분입니다. 과연 평신도분들은 언제 사제를 찾을까요? 함께 진탕 취하고 싶을때일까요? 혹은 정말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거룩한 말씀을 듣고 싶을 때일까요? 이는 수도자와 신학생들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신학생들이 교리교사들을 만나서 그저 가상 연애나 하고 또 수도자들은 상류층 평신도들과 고급진 선물을 받아가며 운치좋은 식당 순례나 다닌다면 자신들이 맺는 열매로 이미 자신의 나무를 드러내는 셈이 됩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친교’를 위해서 모두 필요한 일이라고 말이지요. 하지만 사실 우리들은 압니다. 어느 선까지가 진정 하느님을 전하기 위한 기초적인 친교이고 어느 선부터는 이미 우리의 욕심이 거기에 섞여 들어가는지 알고 있지요.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빛의 자녀들이어야 하고 소금을 지닌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 짠 맛을 잃어버릴 때에 우리는 세상 안에서 사정없이 짓밟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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