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은 온전함을 지니고 있었다.
이든 저든 치우침이 없었다.
설령 치우침이 있다 해도 그것은 바람직한 것이었고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는 것이었다.
하느님은 그렇게 세상을 창조하셨다.
하지만 하느님이 가장 사랑하신 사람들이 이상한 흐름을 만들어 내었다.
세상 조물들의 조화로움에서 벗어나서 자신에게로 향하는 방향을 만들어 낸 것이다.
하느님의 손길 안에서 모든 것이 온전히 조화되어 있던 모습을
인간들은 조금씩 파괴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으고 쌓으면서도 만족할 줄을 모르게 되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그런 엇나감을 채울 방책을 마련하셨다.
그리고 그분이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그런 흐름들, 자신에게로 향하는 파괴적이고 이기적인 흐름들을 치유하도록 하셨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맡겨 죄인들을 용서하는 사랑.
참으로 단순하고 명료한 것이었다.
이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인간들의 그릇된 흐름에 반하여
세상을 치유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기괴한 방향에 놀란 옛사람들,
여전히 이기적이고 파괴적인 그들은
그런 이들을 모아들여 '성인'이라 이름 붙이고
일상에서 동떨어지게 만들어 버렸다.
그들은 기괴한 마법같은 기적을 쓰게 되었고
군중들은 그런 기이한 일들에 환호했으며
실제 그들이 지녔던 사랑은 점점 잊혀져가게 되었다.
진정한 거룩함은 전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갓난쟁이를 등에 업고 양 손에 짐을 지고 가는 엄마의 사랑의 거룩함은
쉽사리 발견되지 않는다.
오직 눈을 뜬 이들만이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있으니
가진 자는 더 받게 되고,
없는 자는 가진 것 마저 빼앗기게 될 것이다.
어딘가로 마구 달리는 차에 브레이크가 없다면
그 차는 살인무기로 바뀌게 된다.
차가 제대로 작동하는 이유는
달리는 한 편, 서기도 하기 때문이다.
완전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저 달리려고만 한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너무나도 달리고 있고
너무나도 소비적이고 소모적이 되어 버렸다.
서는 법을 배우는 사람,
못남을 배우는 사람,
가난을 배우는 사람이
지금의 시대의 흐름에는 더 완전한 사람이 될 터이다.
이 말 뜻을 이해한 사람이라면
잠시 멈춰서 달궈진 머리를 식히길 바랄 뿐이다.
바깥에 바람이 불기 때문이다.
풀잎들의 흔들림을 보고 거기에서 배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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