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5주 목요일
정말 많은 경우에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것을 아는 '체' 합니다.
무언가를 아는 것이 마치 나의 주머니를 불리기라도 하는 양
이런 저런 정보를 지니려고 하고 그것을 아는 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른다'는 말을 들으면 속상해하고 화를 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신원에 대해서 분명히 '알고' 계셨고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곧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유다인들은 자신들을 떠받친다고 생각하는 그 근본 바탕을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누구보다도 확실히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로 드러난 것이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증오와 박해였습니다.
지금의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서
우리는 교회 생활, 신앙 생활에 대해서 안다고 확신하며
그걸 바탕으로 누군가를 증오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것들입니다.
"내가 몇 년을 일해왔는데, 니가 하는 건 다 꽝이야. 해 봐도 안돼."
"내가 이 본당에서 어떤 직책을 맡고 있는지 아세요?"
과거의 경험과 자신의 직분…
교회 안에서 쌓여진 이런 것들은 하나의 도구이고 껍데기일 뿐입니다.
이런 것들을 두고 자신이 하느님의 뜻에 더 근접해 있다고 착각하고 타인들을 단죄하는 수많은 이들이
여전히 교회 안에 그득합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뜻을 전혀 알지 못하고,
그분이 얼마나 낮은 이들을 초대하고 싶어하고
그들과 가까이 살고 싶어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때로 누군가 진정한 '사랑'으로 일을 시작하려 할 때에
그들은 몰려들어 자신들이 쌓아놓은 상아탑이 무너질까 걱정을 하며
그 사람에게 알게 모르게 박해를 가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오직 한 분 예수님만이 그 분을 알고 있고
오직 그 분을 통해서만 하느님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모른다고 하는 것은 그 첫 시작점입니다.
왜냐하면 모른다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의 컵이 비워야 물을 채울 수 있습니다.
컵이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는데 굳이 물을 채워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 외아들이신 분께서 그 사랑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께서 가르쳐주시는 길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것은 낮아짐의 길이고, 내려놓음의 길이었습니다.
죽음으로 죄인을 용서하신 길이고,
그로써 부활을 얻게 되신 길입니다.
바로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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