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본당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어느 아줌마가 찾아왔다. 화장을 한 걸로 봐서는 마냥 가난한 사람은 분명 아니었다. 이야기를 듣자하니 이런 내용이었다.
"신부님, 얼마 전에 딸이 사고를 당해서 다른 신부님(전임 주임 신부님)이 많이 도와주셨거든요. 제가 미혼모라서 딱히 돈이 나올 구석이 없어요. 근데 의사가 그러는데 아이가 회복할때까지 장시간을 누워 있으려면 물침대가 필요하다고 하네요. 어떻게 좀 도와주실 수 없는지요?"
"흠... 도와 드리도록 하지요. 하지만 물침대를 사 드리진 않겠습니다. 저희가 구입한 뒤에 무상으로 대여해 드리도록 하지요. 그럼 물침대 가격만 좀 알아봐 주세요."
그렇게 돌아간 아줌마, 오후에 다시 찾아왔다.
"아, 신부님 물침대는 친척 중에 누가 가지고 있다고 하니까 그걸 빌리면 될 것 같구요. 의사 선생님이 그러는데 아이가 일어나서 걷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보조 보행기가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그걸 좀 사다 주실 수는 없으세요?"
느낌이 이상했다. 이렇게 순식간에 말을 바꾸고 찾아오는 것에 뭔가 꺼림칙한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직접 집을 가 보기로 했다. 사는 곳은 그리 멀지 않았다. 일단 집으로 들어서는데 철제 대문이 있었고 집 안도 나름 깔끔했다. 커다란 오븐도 있고 안에는 아이가 타고다닐 휠체어도 있고 텔레비전이며 필요한 집기들이 다 있었다. '이 아줌마 돈 욕심이 난 거구나...' 싶었다. 마음이 바뀌었다.
"나름 갖추고 사시네요."
"이 집은 동거하는 남자(전에 남자가 있었고 이번이 두 번째 남자임) 거예요."
"그럼 그 사람은 저 아이에 대해서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나요?"
"네 그사람 무책임해요. 그리고 우리더러 나가라고 해요."
"그럼 그 사람 집에 오거든 저에게 알려주세요. 제가 이야기를 해 볼께요."
"신부님 도와 주실 건가요 말건가요?"
마지막에 나에게 따지듯이 묻는 말에 마치 내가 빚을 진 사람이고 뭔가를 받아내야 겠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이 즈음에서 난 본당으로 돌아왔다. 며칠 뒤 그 동거남이 찾아왔다. 그 아줌마가 말한 것처럼 나쁘다거나 아이에 대해 전혀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 전혀 아니었다.
"신부님, 전에 신부님도 수술때에 도와 주셨는데 이번에도 좀 도와 주시면 좋겠습니다. 전의 신부님에게는 제가 오토바이를 맡기고 돈을 빌리기도 했습니다.(그 이전에 벌써 많은 수술비를 도와주었고 거기에 자꾸 더 필요하다 해서 오토바이를 보관하고 더 빌려준 상황)."
"아, 저 오토바이의 주인이시군요. 드디어 만났네요. 전에도 벌써 많은 도움을 드렸고 이제는 더 이상 무턱대고 도움을 드릴 순 없습니다. 다가오는 주일 미사에 나오시면 상황을 전 신자들에게 공지하고 도움을 얻도록 하지요.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아, 그리고 저 맡긴 오토바이 계속 찾아가지 않으면 제가 팔아버리겠습니다."
아저씨는 오토바이를 팔겠다는 말에 긴장하며 미사 때에 나오겠다고 하고는 돌아갔다. 하지만 결국 미사때에는 나오지 않았다. 며칠 뒤에 그 아줌마가 다시 찾아왔다.
"신부님, 왜 안 도와 주시는 겁니까?"
"제가 동거하시는 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분별했을 때에는 당신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은 거짓말장이입니다. 저는 거짓말 하는 게 아닌데요. 사제가 왜 도움을 주지 않지요?"
"잠깐만요… 한 가지는 분명히 합시다. 혹시 제가 뭔가 당신에게 빚진 게 있나요? 대답해보세요."
"없습니다."
"좋습니다. 지난 미사때 오면 사람들을 통해서 도움을 드리겠다고 했지만 오지 않았습니다. 한 번 더 기회를 드리지요. 미사때 나오시면 앞에 나와서 상황 설명을 하고 사람들의 도움을 청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그렇게는 싫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군요.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제가 거짓말을 하는 지 아닌지는 하느님이 아실 겁니다."
그렇게 서로 약간은 흥분한 상태로 아줌마는 돌아갔다. 그래 돈이 없는 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안다. 하지만 그 돈을 어떻게 구하려고 하는지가 문제인거다. 이 아줌마는 자기 자존심을 손상치 않고 제일 손쉬운 방법을 찾아서 교회를 찾아온거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보다 필사적이었을 것이다. 하다못해 정말 급한 돈이었다면, 정말 자신의 딸에게 보조기를 사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면 집안에 가지고 있는 집기를 싼 값에 팔아서라도 그 돈을 마련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또 며칠 후에 동거남이 찾아왔다.
"신부님, 저 오토바이를 살 사람을 구했습니다. 잠시 집안에 들어가서 오토바이를 봐도 될까요?"
"네 그러십시오."
입안 잔뜩 꼬까잎을 문 아저씨가 들어와서 오토바이를 유심히 본다. 그리고는 300$에 사겠다며 계약이 성사되었다. 그렇게 오후에 아저씨가 와서 빌린 돈을 나에게 내민다. 그 자리에서 200Bs.를 돌려주며 말했다.
"이 돈으로 아이 보조기 사는데 보태세요. 그리고 오토바이 가져가시고 가족 잘 돌보세요. 아이는 아무 죄가 없으니까요. 사실 저에게는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그 돈을 청하느냐가 더 중요해요. 그리고 같이 사는 그 아줌마 조금은 조심하셔야 할 듯 해요."
아저씨는 고맙다며 돌아갔다. 혹시 트럭 고장나면 자기에게 맡기라는 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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