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마르 4,40)
겁을 내는 것과 신경을 쓰는 것은 다른 차원입니다. 겁은 겁을 내는 대상이 겁을 내는 주체를 조종하다시피 합니다.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고 하기 싫은 것을 하게 만들지요. 신경을 쓰는 것은 다른 차원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지만 상대를 배려하는 것이지요. 엄마는 얼마든지 칼을 쓸 수 있지만 아이가 배울까봐 아이가 보는 앞에서 칼을 쓰지 않을 뿐입니다.
사람이 든든하게 의지할 것이 있으면 겁이 사라집니다. 반대로 겁이 많은 만큼 두려워할 대상이 많다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겁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겁’의 가장 근본에는 ‘죽음의 두려움’이 숨어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서 따지고 들어가보면 결국 거기에 가서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죽을까봐 겁이 나는 것이지요.
참된 신앙을 지닌다는 것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 죽음의 독침은 죄이며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 (1코린 15,54-56)
신앙인이 된다는 것의 궁극적인 의미는 ‘부활신앙’을 지닌다는 것이고 한마디로 죽을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서 신앙인들은 겁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겁이 많습니다. 직장 걱정, 집 걱정, 돈 걱정, 가족 걱정… 그 수많은 걱정들은 내가 진정한 나 자신이 되는 것을 방해하지요. 스스로를 가두는 사람은 영원히 갇혀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나올 수 있는 열쇠는 자기 자신이 들고 있다는 것을 모르니 더욱 안타까울 뿐이지요.
겁을 내는 것과 신경을 쓰는 것은 다른 차원입니다. 겁은 겁을 내는 대상이 겁을 내는 주체를 조종하다시피 합니다.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고 하기 싫은 것을 하게 만들지요. 신경을 쓰는 것은 다른 차원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지만 상대를 배려하는 것이지요. 엄마는 얼마든지 칼을 쓸 수 있지만 아이가 배울까봐 아이가 보는 앞에서 칼을 쓰지 않을 뿐입니다.
사람이 든든하게 의지할 것이 있으면 겁이 사라집니다. 반대로 겁이 많은 만큼 두려워할 대상이 많다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겁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겁’의 가장 근본에는 ‘죽음의 두려움’이 숨어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서 따지고 들어가보면 결국 거기에 가서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죽을까봐 겁이 나는 것이지요.
참된 신앙을 지닌다는 것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 죽음의 독침은 죄이며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 (1코린 15,54-56)
신앙인이 된다는 것의 궁극적인 의미는 ‘부활신앙’을 지닌다는 것이고 한마디로 죽을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서 신앙인들은 겁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겁이 많습니다. 직장 걱정, 집 걱정, 돈 걱정, 가족 걱정… 그 수많은 걱정들은 내가 진정한 나 자신이 되는 것을 방해하지요. 스스로를 가두는 사람은 영원히 갇혀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나올 수 있는 열쇠는 자기 자신이 들고 있다는 것을 모르니 더욱 안타까울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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