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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다가온 하늘나라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마태 4,17)

회개를 해야 하는 이유는 돌아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길에서 이미 벗어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공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시면서 ‘그래, 너희들 아주 잘 하고 있구나. 너희들에게는 별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겠구나. 너희는 이미 잘 하고 있고 아무런 죄도 없는 순수하고 맑은 이들이니까 말이다.’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죄인들,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방황하고 있던 이들을 부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남을 심판하는 사람은 적어도 자신의 판단 기준이 옳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똑바로 서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완벽하다고 판단하기에 그 완벽한 판단을 바탕으로 남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나도 조난을 당한 상황에서 상대가 물에 빠졌다고 비웃는 것은 웃기는 일입니다. 내가 상대를 건지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물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과연 무엇이 물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단순히 상대가 저지르는 부정을 나는 현실적으로 저지르지 않았기에 나는 깨끗하고 정결한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혹시 나에게는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지 않을까요? 나 역시도 같은 부와 권력에 사로잡혀 그런 자리에 있으면서 더 많은 부와 권력을 노릴 수 있을 가능성이 존재할 때에 그것을 과감히 뿌리치고 청렴 결백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요? 이는 각자 스스로 대답해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메세지를 전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완벽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영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그분에 힘입어’ 우리는 메세지를 선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메세지는 세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보다 심도깊은 의미, 영원에 맞닿은 의미인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똑똑하다는 이들은 저마다 자기 식대로 그 메세지를 해석해 버리고 맙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그 많은 돈을 유지하기 위해 예수를 팔고, 반대편에 있는 이들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예수를 전면에 내세웁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세례 때에 하느님의 부탁을 잊어버리고 만 셈이지요.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그분이 우리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그분의 말을 듣고 있을까요? 그분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걸까요?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고,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식으로 그분의 말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하늘나라가 다가오긴 했지만 결국 우리가 하늘나라를 받아들이고 거기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현세의 하늘나라를 꿈꾸고 있습니다. 반대되는 세력을 전복하고 그 자리를 꿰어 찬다고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이 들어찬 그들이 다시 똑같은 탐욕을 부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미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지요. 수많은 전복이 있었고 매번 비슷한 일이 일어났음에도 사람들은 이번에도 바뀌어야 한다고만 하고 진정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은 제쳐두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인간을 진정으로 더럽히는 것은 그 안에 가득찬 탐욕, 방종, 오만, 악의, 증오, 분노와 같은 것입니다. 그걸 바꾸지 않은 채로 길거리 청소를 한다고 해서 다음에 술에 진탕 취한 사람들이 와서 구토물을 쏟아놓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로 회개를 해야 하고, 다가온 하늘 나라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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