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1요한 4,10)
우리가 하느님을 선택한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선택했다면 우리가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하느님을 저버립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선택하셨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응답’일 뿐입니다. 우리의 ‘선택’이 아니지요.
부르는 사람의 능력치에 따라서 그 부름에 응답하였을 때의 결과가 달라집니다. 부르는 사람이 동네 슈퍼마켓 아저씨라면 아이스크림 하나 얻어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르는 사람이 대기업 회장님이라면 낙하산을 탈 수도 있는 노릇이지요. 헌데 부르시는 분이 하느님이라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지라고 하느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종’으로 부르신 게 아니라 ‘친구’로 부르셨고, 당신 외아들의 공동 상속자가 되라고 부르셨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많은 이들은 그분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분이 내어주실 수 있는 고귀한 직분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부르심을 소홀히 합니다.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은 단순히 율법적 규정 준수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러한 것들도 잘 지켜야 하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내면의 움직임입니다. 우리가 입으로만 사랑을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사랑하는 것이 죽는 것만큼 싫다면 그 사람은 전혀 사랑하는 것이 아니게 되는 것이지요. 그는 뭔가에 두려움을 느끼고 사로잡혀 있거나 다른 유익 때문에 사랑하는 척을 할 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정말 좋은 것을 주시려 하시지요. 우리는 그분의 사랑에 맛들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런 우리들을 갖은 방법을 다 써서 유혹하려고 들 것이고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에게서 떼어놓으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지 않으면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선택한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선택했다면 우리가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하느님을 저버립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선택하셨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응답’일 뿐입니다. 우리의 ‘선택’이 아니지요.
부르는 사람의 능력치에 따라서 그 부름에 응답하였을 때의 결과가 달라집니다. 부르는 사람이 동네 슈퍼마켓 아저씨라면 아이스크림 하나 얻어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르는 사람이 대기업 회장님이라면 낙하산을 탈 수도 있는 노릇이지요. 헌데 부르시는 분이 하느님이라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지라고 하느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종’으로 부르신 게 아니라 ‘친구’로 부르셨고, 당신 외아들의 공동 상속자가 되라고 부르셨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많은 이들은 그분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분이 내어주실 수 있는 고귀한 직분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부르심을 소홀히 합니다.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은 단순히 율법적 규정 준수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러한 것들도 잘 지켜야 하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내면의 움직임입니다. 우리가 입으로만 사랑을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사랑하는 것이 죽는 것만큼 싫다면 그 사람은 전혀 사랑하는 것이 아니게 되는 것이지요. 그는 뭔가에 두려움을 느끼고 사로잡혀 있거나 다른 유익 때문에 사랑하는 척을 할 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정말 좋은 것을 주시려 하시지요. 우리는 그분의 사랑에 맛들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런 우리들을 갖은 방법을 다 써서 유혹하려고 들 것이고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에게서 떼어놓으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지 않으면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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