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냥 들어서 상상하는 것과는 다른 세상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전해 듣고 그것을 상상하기 시작하면 머릿 속에 하나의 이미지가 생겨납니다. 그러나 그 이미지라는 것은 군더더기가 제거된 이미지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레고 블록으로 집을 지어놓고 스스로 훌륭한 집을 지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집에는 난방도 고려되어야 하고, 수도도 들어가야 하고, 전기 시설도 적합한 전류에 맞춰서 설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이의 상상 속에서 그런 것은 전혀 고려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이지요.
사실 인생을 먼저 살아보고나서 그 뒤에 다시 인생을 사는 이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은 단 한 번 뿐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체험하면서 다시 살아갈 방향을 정하는 것이지요.
문제는 그러한 체험과 방향설정 중에 ‘영원’, 또는 ‘내면의 가치’를 향한 방향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체험해 보지 못했기에 누군가에게 가르칠 수도 없고, 결국 가르침을 받지 못한 이들은 다시 전해주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지요.
물질적인 생활의 질은 갈수록 나아지는데 영적인 공허감은 더욱 더 가중되기만 합니다.
바로 그 때에 ‘초대’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와서 보라’고 하십니다. 여기 한 인간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비록 가진 것도 충분치 않고 경력도 없지만 그가 얼마나 충만하게 살고 있는지 와서 보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가서 보고 알게 됩니다.
하느님이라는 분이 계시고, 그분이 모든 생을 선물하신 분이라는 것, 그리고 세상이라는 것은 그분의 창조물에 불과하며 우리에게는 보다 중요하게 신경써야 할 일이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전해지는 가르침입니다.
와서 보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예수님을 상상하기만 하면 전혀 엉뚱한 모습의 그분이 그려질 뿐입니다.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느냐구요? 여러분 가운데 가장 작은 이의 모습으로 계십니다. 당신의 할아버지, 할머니, 당신의 형제와 자매, 당신 주변의 가장 가난한 이웃의 모습으로 계십니다. 이제 그들을 직접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집에는 난방도 고려되어야 하고, 수도도 들어가야 하고, 전기 시설도 적합한 전류에 맞춰서 설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이의 상상 속에서 그런 것은 전혀 고려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이지요.
사실 인생을 먼저 살아보고나서 그 뒤에 다시 인생을 사는 이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은 단 한 번 뿐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체험하면서 다시 살아갈 방향을 정하는 것이지요.
문제는 그러한 체험과 방향설정 중에 ‘영원’, 또는 ‘내면의 가치’를 향한 방향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체험해 보지 못했기에 누군가에게 가르칠 수도 없고, 결국 가르침을 받지 못한 이들은 다시 전해주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지요.
물질적인 생활의 질은 갈수록 나아지는데 영적인 공허감은 더욱 더 가중되기만 합니다.
바로 그 때에 ‘초대’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와서 보라’고 하십니다. 여기 한 인간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비록 가진 것도 충분치 않고 경력도 없지만 그가 얼마나 충만하게 살고 있는지 와서 보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가서 보고 알게 됩니다.
하느님이라는 분이 계시고, 그분이 모든 생을 선물하신 분이라는 것, 그리고 세상이라는 것은 그분의 창조물에 불과하며 우리에게는 보다 중요하게 신경써야 할 일이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전해지는 가르침입니다.
와서 보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예수님을 상상하기만 하면 전혀 엉뚱한 모습의 그분이 그려질 뿐입니다.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느냐구요? 여러분 가운데 가장 작은 이의 모습으로 계십니다. 당신의 할아버지, 할머니, 당신의 형제와 자매, 당신 주변의 가장 가난한 이웃의 모습으로 계십니다. 이제 그들을 직접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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