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정말 피곤해서 잠을 자고 싶은데도 아이가 울기 시작하면 엄마는 일어나야 해요. 왜냐하면 저 생명은 나에게 달린 거니까요. 그 마음 때문에 일어나야 하는거죠.”
예전 청년이었다가 지금은 주부가 된 이들을 만나면서 엄마가 된 소감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들은 말입니다.
그렇지요, 누군가의 생을 책임진다는 것이 ‘엄마’의 사명인 것입니다. 엄마는 단순히 생명을 싸지르고 마는 존재가 아니라 ‘책임감’을 수반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모성애’라는 것은 하늘이 내린 천부적인 능력이지요.
볼리비아에서 수많은 ‘엄마’들을 만납니다. 공통점은 아이를 위해서 헌신한다는 것이지요. 선교 사제로서 장례를 많이 치르지만 ‘엄마’의 장례식은 분명히 다릅니다. 여느 남성들의 장례식과는 달리 ‘엄마’의 장례식은 자녀들의 감사와 애정이 늘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지만 실제 그 역할에 있어서는 ‘엄마’를 제외하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엄마의 마음으로 우리의 영적인 삶을 돌보십니다. 하느님 당신이 없으면 죽어 버릴 우리들이기에 당신은 꾸준히 우리를 보살피십니다.
우리가 엄마에 대한 감사를 자라면서 잊어 버리는 것처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에 대해서도 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다가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그 깨달음이 살아 생전에 이루어질 수 있다면 좋으련만, 어리석은 우리는 때로 너무나 늦게 그것을 깨닫고 맙니다.
육의 자녀를 키우는 것이 그토록 사명감이 필요하고 힘든 일이라면 ‘영의 자녀’를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기엔 우리들은 너무나 장님들입니다. 아이에게 ‘알파벳’이 가득한 장난감을 사줄 줄은 알면서 ‘영원하신 분’에 대한 가르침을 지나치게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이미 말했지만 단순히 싸지른다고 엄마는 아닌 것입니다. 엄마들의 막중한 사명감을 이해하지만 육신 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영혼이 중요하다는 것도 잊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전 청년이었다가 지금은 주부가 된 이들을 만나면서 엄마가 된 소감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들은 말입니다.
그렇지요, 누군가의 생을 책임진다는 것이 ‘엄마’의 사명인 것입니다. 엄마는 단순히 생명을 싸지르고 마는 존재가 아니라 ‘책임감’을 수반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모성애’라는 것은 하늘이 내린 천부적인 능력이지요.
볼리비아에서 수많은 ‘엄마’들을 만납니다. 공통점은 아이를 위해서 헌신한다는 것이지요. 선교 사제로서 장례를 많이 치르지만 ‘엄마’의 장례식은 분명히 다릅니다. 여느 남성들의 장례식과는 달리 ‘엄마’의 장례식은 자녀들의 감사와 애정이 늘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지만 실제 그 역할에 있어서는 ‘엄마’를 제외하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엄마의 마음으로 우리의 영적인 삶을 돌보십니다. 하느님 당신이 없으면 죽어 버릴 우리들이기에 당신은 꾸준히 우리를 보살피십니다.
우리가 엄마에 대한 감사를 자라면서 잊어 버리는 것처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에 대해서도 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다가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그 깨달음이 살아 생전에 이루어질 수 있다면 좋으련만, 어리석은 우리는 때로 너무나 늦게 그것을 깨닫고 맙니다.
육의 자녀를 키우는 것이 그토록 사명감이 필요하고 힘든 일이라면 ‘영의 자녀’를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기엔 우리들은 너무나 장님들입니다. 아이에게 ‘알파벳’이 가득한 장난감을 사줄 줄은 알면서 ‘영원하신 분’에 대한 가르침을 지나치게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이미 말했지만 단순히 싸지른다고 엄마는 아닌 것입니다. 엄마들의 막중한 사명감을 이해하지만 육신 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영혼이 중요하다는 것도 잊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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