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라는 직분을 지니고 있지만 선교사도 되었다가 옛 친구도 되었다가 주임 신부도 되었다가 직장 동료도 되었다가 아들도 되었다가 동생도 되었다가 은근 슬쩍 연인도 되었다가 합니다.
나라는 사람은 변하는 게 별로 없지만 나를 대하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필요로 나를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쉬움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사제’이기 때문이지요.
사제는 사제일 때 제 역할을 하는 법입니다. 칼은 물건을 자를 때에 쓰는 것인데 그 칼을 액자에 넣고 벽에다 걸어놓으면 그것은 사실 더는 ‘칼’이 아니라 ‘장식품’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우리는 일상 안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을 저마다의 직분으로 대합니다. 커피숍 카운터 직원에게 인생상담을 하는 사람은 없고, 은행 경비원에게 돈을 빌리지 않습니다. 저마다의 역할 속에서 그를 만나는 것이지요. 하지만 유독 ‘사제’는 사제 본연의 역할 안에서 만나는 경우가 참으로 드문 것 같습니다.
왜 그런 걸까요?
어쩌면 사제는 그 모든 것을 품어 안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단순히 ‘사제의 역할’이라는 것에 제한을 받지 않는 만인의 동반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제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쉬움은 있습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는 이유는 모든 이를 하느님께로 이끌기 위함이라는 것에 바탕을 둡니다. 사제도 그를 자신의 필요대로 만나는 신자도 이를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시피 이 부분이 자주 망각됩니다.
사제를 만나고 나면 하느님을 떠올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일년 가운데 몇 번 되지 않는 동안 사제를 만나서는 온 마음으로 그 사제에게서 하느님의 도움을 갈구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라는 사람은 변하는 게 별로 없지만 나를 대하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필요로 나를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쉬움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사제’이기 때문이지요.
사제는 사제일 때 제 역할을 하는 법입니다. 칼은 물건을 자를 때에 쓰는 것인데 그 칼을 액자에 넣고 벽에다 걸어놓으면 그것은 사실 더는 ‘칼’이 아니라 ‘장식품’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우리는 일상 안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을 저마다의 직분으로 대합니다. 커피숍 카운터 직원에게 인생상담을 하는 사람은 없고, 은행 경비원에게 돈을 빌리지 않습니다. 저마다의 역할 속에서 그를 만나는 것이지요. 하지만 유독 ‘사제’는 사제 본연의 역할 안에서 만나는 경우가 참으로 드문 것 같습니다.
왜 그런 걸까요?
어쩌면 사제는 그 모든 것을 품어 안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단순히 ‘사제의 역할’이라는 것에 제한을 받지 않는 만인의 동반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제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쉬움은 있습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는 이유는 모든 이를 하느님께로 이끌기 위함이라는 것에 바탕을 둡니다. 사제도 그를 자신의 필요대로 만나는 신자도 이를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시피 이 부분이 자주 망각됩니다.
사제를 만나고 나면 하느님을 떠올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일년 가운데 몇 번 되지 않는 동안 사제를 만나서는 온 마음으로 그 사제에게서 하느님의 도움을 갈구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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