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어떤 이를 마음에 들어 하실까요? 사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마음에 들고 싶어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이를 하느님이 좋아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무엇에 열심이고 무엇에 최선인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열심이고 최선인 것이 실제로는 하느님의 마음에 전혀 들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성당 봉사자로 열심히 일하면 하느님의 마음에 들까요? 그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성당 봉사자의 일을 하면서 사람들에게서 명성을 얻고 정작 자신의 가정을 소홀히 한다면 거기에는 문제가 있게 마련이고 하느님은 그런 이를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거룩한 것, 영적인 것을 최대한 끌어들이는 이를 좋아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거룩한 것, 영적인 것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고 그저 좋다는 강좌, 좋다는 신심 프로그램을 모두 쫓아다니면서 소위 자신의 스펙을 쌓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느님은 그런 이를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소위 ‘거룩하다는 분’ 곁에 머물면 하느님이 좋아 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보좌 신부님을 모시고, 주임 신부님을 모시고, 나아가서 교회의 고위직분에 있는 이들과 시간을 보내면 하느님이 좋아하실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런 이들을 통해서 우리를 성화 시키려고 하시지, 우리가 그런 분들을 모시면서 온갖 세속적인 좋은 것들을 선사하라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여기 하느님의 마음에 드시는 아들이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마음에 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한다면 바로 예수님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말은 단순히 입으로 예수님의 몸을 집어 넣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생활하신 바를 나도 따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이 표현, ‘예수님을 받아들이기’라는 표현은 올바로 이해하지 않으면 참으로 애매모호한 것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책 안에 적혀진 어느 단순한 위인이 아니라 아직도 살아계시고 생활하고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직도 생생히 살아 계십니다. 헌데 적지 않은 이들은 이미 죽은 예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예수님을 바로 곁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 즉 예수님을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은 삶이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교황님을 옆에 모시고 딴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죽여 버리고 그 껍데기를 쥐고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법을 굉장히 중요시 합니다. 그들에게 모든 것들은 이미 정해진 규격과 틀이 있습니다. 죽은 것은 관에 짜 넣기 좋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살아있는 것은 가두어 둘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것은 함께 상호관계를 가져야 하는 것이지요. 물어보고 대답을 듣고, 고쳐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맺는 관계는 그러해야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입니다. 그 누구든지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언제나 예수님과 더불어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이를 하느님이 좋아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무엇에 열심이고 무엇에 최선인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열심이고 최선인 것이 실제로는 하느님의 마음에 전혀 들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성당 봉사자로 열심히 일하면 하느님의 마음에 들까요? 그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성당 봉사자의 일을 하면서 사람들에게서 명성을 얻고 정작 자신의 가정을 소홀히 한다면 거기에는 문제가 있게 마련이고 하느님은 그런 이를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거룩한 것, 영적인 것을 최대한 끌어들이는 이를 좋아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거룩한 것, 영적인 것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고 그저 좋다는 강좌, 좋다는 신심 프로그램을 모두 쫓아다니면서 소위 자신의 스펙을 쌓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느님은 그런 이를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소위 ‘거룩하다는 분’ 곁에 머물면 하느님이 좋아 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보좌 신부님을 모시고, 주임 신부님을 모시고, 나아가서 교회의 고위직분에 있는 이들과 시간을 보내면 하느님이 좋아하실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런 이들을 통해서 우리를 성화 시키려고 하시지, 우리가 그런 분들을 모시면서 온갖 세속적인 좋은 것들을 선사하라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여기 하느님의 마음에 드시는 아들이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마음에 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한다면 바로 예수님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말은 단순히 입으로 예수님의 몸을 집어 넣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생활하신 바를 나도 따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이 표현, ‘예수님을 받아들이기’라는 표현은 올바로 이해하지 않으면 참으로 애매모호한 것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책 안에 적혀진 어느 단순한 위인이 아니라 아직도 살아계시고 생활하고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직도 생생히 살아 계십니다. 헌데 적지 않은 이들은 이미 죽은 예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예수님을 바로 곁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 즉 예수님을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은 삶이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교황님을 옆에 모시고 딴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죽여 버리고 그 껍데기를 쥐고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법을 굉장히 중요시 합니다. 그들에게 모든 것들은 이미 정해진 규격과 틀이 있습니다. 죽은 것은 관에 짜 넣기 좋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살아있는 것은 가두어 둘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것은 함께 상호관계를 가져야 하는 것이지요. 물어보고 대답을 듣고, 고쳐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맺는 관계는 그러해야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입니다. 그 누구든지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언제나 예수님과 더불어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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