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마르 4,24)
무엇을 주어야 하는가?
우리는 뭔가를 주고 받는다고 하면 무턱대고 ‘돈’이나 ‘재화’를 떠올립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을 단순히 물질적인 것에 축소시키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 인간이 무언가를 내어줄 때는 사실 그 ‘물건’을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내어줄 마음이 없으면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내어주지 못하게 마련입니다. 내가 아무리 집에 돈이 많아도 미운 놈에게는 돌멩이 하나 내어주지 못하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열린 마음을 지녀야 하고 마음을 내어주어야 합니다.
어떻게 줄 수 있는가?
받은 만큼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받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면 역시 내어줄 마음도 없어지게 됩니다. 모든 것이 ‘나의 것’이고 ‘내가 생산해 낸 것’이라면 아까워서 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온전히 ‘나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건강과 우리의 기본 환경을 사실은 모두 ‘선물 받았다’는 것을 올바로 깨닫는 사람은 비로소 내어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이런 이들을 찾아보기가 굉장히 힘이 듭니다.
무엇을 받았는가?
여기에서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길이 갈립니다. 제 아무리 성당을 나가고 미사를 참례한다고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진정한 신앙인의 자세는 하느님 앞의 겸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미사를 나와주니 하느님 당신은 나에게 축복을 내어 주어야 하오.’라는 식의 사고는 곤란합니다. 실제로 그러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내어서 성당 활동에 참여하고 있으니 마치 자신은 축복을 마땅히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받는 축복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생명도 모든 것의 시작도 하느님 덕분입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하느님과 거래를 하려고 드는 이들이 있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내어주지 못하는 이들
결국 받은 것이 없다고 믿는 그들, 즉 하느님에 대한 참된 신앙이 자리잡지 못한 이들은 내어주지 못합니다. 내어 주는 ‘척’을 할 뿐이지요. 그들은 되어주는 것이 아니라 받을 걸 예상하고 내어줄 뿐입니다. 미리 받을 정도를 감안해서 내어주니 그것은 ‘내어줌’이 아니라 ‘거래’이지요. 받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지 이루어집니다. 나의 명예를 드높이려는 사람, 내어주는 것을 통해서 다른 이윤을 더 높이려는 사람… 형태는 다양합니다. 하지만 공통점은 ‘내가 먼저 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부재’라는 것입니다.
내어주는 이들
미리 받은 것을 인지하고 감사하는 이들, 그래서 지금 자신의 손아귀에 든 것이 실은 모두 하느님의 것이라는 것을 아는 이들은 자신이 필요한 만큼을 사용하고 나머지를 모두 필요한 이들에게 내어줄 줄 압니다. 그들은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아까워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나의 가능성이 아니라 상대의 필요를 바라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쓰고 남아 돌아 썩으려는 것에서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진실로 필요한 것을 바라보는 이들이지요. 왜냐하면 그들은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서 자신의 욕구를 참아 견디기도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헌신이고 사랑이지요.
실천
남은 것은 실천입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해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전혀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다른 이의 절실한 필요 앞에서는 구두쇠가 되는 이들은 스스로를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을 주어야 하는가?
우리는 뭔가를 주고 받는다고 하면 무턱대고 ‘돈’이나 ‘재화’를 떠올립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을 단순히 물질적인 것에 축소시키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 인간이 무언가를 내어줄 때는 사실 그 ‘물건’을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내어줄 마음이 없으면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내어주지 못하게 마련입니다. 내가 아무리 집에 돈이 많아도 미운 놈에게는 돌멩이 하나 내어주지 못하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열린 마음을 지녀야 하고 마음을 내어주어야 합니다.
어떻게 줄 수 있는가?
받은 만큼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받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면 역시 내어줄 마음도 없어지게 됩니다. 모든 것이 ‘나의 것’이고 ‘내가 생산해 낸 것’이라면 아까워서 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온전히 ‘나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건강과 우리의 기본 환경을 사실은 모두 ‘선물 받았다’는 것을 올바로 깨닫는 사람은 비로소 내어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이런 이들을 찾아보기가 굉장히 힘이 듭니다.
무엇을 받았는가?
여기에서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길이 갈립니다. 제 아무리 성당을 나가고 미사를 참례한다고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진정한 신앙인의 자세는 하느님 앞의 겸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미사를 나와주니 하느님 당신은 나에게 축복을 내어 주어야 하오.’라는 식의 사고는 곤란합니다. 실제로 그러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내어서 성당 활동에 참여하고 있으니 마치 자신은 축복을 마땅히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받는 축복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생명도 모든 것의 시작도 하느님 덕분입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하느님과 거래를 하려고 드는 이들이 있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내어주지 못하는 이들
결국 받은 것이 없다고 믿는 그들, 즉 하느님에 대한 참된 신앙이 자리잡지 못한 이들은 내어주지 못합니다. 내어 주는 ‘척’을 할 뿐이지요. 그들은 되어주는 것이 아니라 받을 걸 예상하고 내어줄 뿐입니다. 미리 받을 정도를 감안해서 내어주니 그것은 ‘내어줌’이 아니라 ‘거래’이지요. 받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지 이루어집니다. 나의 명예를 드높이려는 사람, 내어주는 것을 통해서 다른 이윤을 더 높이려는 사람… 형태는 다양합니다. 하지만 공통점은 ‘내가 먼저 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부재’라는 것입니다.
내어주는 이들
미리 받은 것을 인지하고 감사하는 이들, 그래서 지금 자신의 손아귀에 든 것이 실은 모두 하느님의 것이라는 것을 아는 이들은 자신이 필요한 만큼을 사용하고 나머지를 모두 필요한 이들에게 내어줄 줄 압니다. 그들은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아까워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나의 가능성이 아니라 상대의 필요를 바라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쓰고 남아 돌아 썩으려는 것에서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진실로 필요한 것을 바라보는 이들이지요. 왜냐하면 그들은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서 자신의 욕구를 참아 견디기도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헌신이고 사랑이지요.
실천
남은 것은 실천입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해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전혀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다른 이의 절실한 필요 앞에서는 구두쇠가 되는 이들은 스스로를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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