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가진 고질병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신앙생활을 수동적이고 방어적입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나쁜 짓’을 하지 않았으니 되었다는 것이지요. 나는 살인을 하지도 않고, 구타를 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그런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보고 비난할 수 있는 윤리적 깨끗함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지요. 그리고는 그 상태로 굳어 버리기 시작합니다. 미사를 갑니다. 하지만 가고 싶어서 가는 미사가 아닙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가는 미사가 아니라 ‘가야 해서’ 가는 미사입니다. 왜냐면 ‘윤리적 청결함’을 유지해야 하니까요. 신앙생활이 기쁨과 행복의 생활이 아니라 의무와 수동적인 생활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옛 부대에 담긴 옛 포도주가 되는 것이지요. 이 모든 것을 요약해서 한 마디로 정돈을 하면 ‘현상유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나빠지지 않으려 하지만 더 좋아지지도 않는 상태. 그러나 그러는 동안 영혼이 점점 굳어가는 상태입니다. 왜냐면 결국 우리는 세상 안에서 살아가고 어떻게든 세상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지요.
이제 잘 새겨 들으십시오.
‘적극성’이 필요합니다. 나서서 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바를 하고 때로는 내가 할 수 없어 보이는 일마저도 시도를 해서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어린 아이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 아이는 아직 세상에 나가서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십년을 자기가 알고 있는 ‘가나다’를 반복하고만 있다면 그 아이는 훗날 자라나서 얼마든지 세상에 나가서 일을 할 수 있는 신체적 정신적 기반이 존재함에도 여전히 멍청하게 ‘가나다’만 반복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이에게 힘든 사명을 부여합니다. 새로운 교과서를 주고 배우게 합니다. 때로는 힘에 부쳐서 아이가 들고 가다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넘어져 버리고 말 과제도 부여합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쓰러져 넘어진다고 아이를 힐책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그 아이에게 일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동안 아이는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덜 쓰러지게 되고 더 큰 일도 시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그건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야.’라고 생각하면서 늘 하던 일들, 주일미사 참례, 교무금 납부, 반모임, 레지오, 교리교사 생활, 청년회 활동, 기타 신심 행위 등등의 교회 내 돌고 도는 똑같은 생활만을 반복하다가는 그대로 옛 부대에 같힌 신자가 되고 맙니다. 그럼 도대체 뭘 해야 하느냐구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성당 활동 외에 도대체 뭘 더 해야 하느냐구요? 바로 거기에서부터 여러분의 상상력이 틀어막혀 있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어린아이이고 입을 벌리고 엄마가 입에 먹을 것을 넣어주기만을 기다리는 아기새에 불과합니다. 네, 하느님은 먹을 것을 넣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기새가 둥지를 나와서 날개짓을 시도하지 않으면 자신이 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결국 날개는 퇴화되고 맙니다. 무엇을 해야 하느냐구요? 그것부터 찾아 보십시오. 할 일은 널리고 널렸기 때문이지요. 다만 여러분이 ‘하기 싫은’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신앙생활을 수동적이고 방어적입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나쁜 짓’을 하지 않았으니 되었다는 것이지요. 나는 살인을 하지도 않고, 구타를 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그런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보고 비난할 수 있는 윤리적 깨끗함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지요. 그리고는 그 상태로 굳어 버리기 시작합니다. 미사를 갑니다. 하지만 가고 싶어서 가는 미사가 아닙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가는 미사가 아니라 ‘가야 해서’ 가는 미사입니다. 왜냐면 ‘윤리적 청결함’을 유지해야 하니까요. 신앙생활이 기쁨과 행복의 생활이 아니라 의무와 수동적인 생활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옛 부대에 담긴 옛 포도주가 되는 것이지요. 이 모든 것을 요약해서 한 마디로 정돈을 하면 ‘현상유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나빠지지 않으려 하지만 더 좋아지지도 않는 상태. 그러나 그러는 동안 영혼이 점점 굳어가는 상태입니다. 왜냐면 결국 우리는 세상 안에서 살아가고 어떻게든 세상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지요.
이제 잘 새겨 들으십시오.
‘적극성’이 필요합니다. 나서서 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바를 하고 때로는 내가 할 수 없어 보이는 일마저도 시도를 해서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어린 아이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 아이는 아직 세상에 나가서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십년을 자기가 알고 있는 ‘가나다’를 반복하고만 있다면 그 아이는 훗날 자라나서 얼마든지 세상에 나가서 일을 할 수 있는 신체적 정신적 기반이 존재함에도 여전히 멍청하게 ‘가나다’만 반복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이에게 힘든 사명을 부여합니다. 새로운 교과서를 주고 배우게 합니다. 때로는 힘에 부쳐서 아이가 들고 가다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넘어져 버리고 말 과제도 부여합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쓰러져 넘어진다고 아이를 힐책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그 아이에게 일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동안 아이는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덜 쓰러지게 되고 더 큰 일도 시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그건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야.’라고 생각하면서 늘 하던 일들, 주일미사 참례, 교무금 납부, 반모임, 레지오, 교리교사 생활, 청년회 활동, 기타 신심 행위 등등의 교회 내 돌고 도는 똑같은 생활만을 반복하다가는 그대로 옛 부대에 같힌 신자가 되고 맙니다. 그럼 도대체 뭘 해야 하느냐구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성당 활동 외에 도대체 뭘 더 해야 하느냐구요? 바로 거기에서부터 여러분의 상상력이 틀어막혀 있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어린아이이고 입을 벌리고 엄마가 입에 먹을 것을 넣어주기만을 기다리는 아기새에 불과합니다. 네, 하느님은 먹을 것을 넣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기새가 둥지를 나와서 날개짓을 시도하지 않으면 자신이 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결국 날개는 퇴화되고 맙니다. 무엇을 해야 하느냐구요? 그것부터 찾아 보십시오. 할 일은 널리고 널렸기 때문이지요. 다만 여러분이 ‘하기 싫은’ 것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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