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두려움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두려움을 알지 못합니다. 반대로 두려워하는 이는 사랑한다고 할 수 없지요.
사랑은 오직 한 분에게서 그 출처를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시지요. 그분은 오로지 ‘사랑’ 뿐입니다.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지금 말하는 두려움은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는 ‘두려움’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 합당한 경외심을 가지는 것이 맞습니다. 그분의 위대함과 무한함 앞에서 우리는 마땅히 두려운 마음이 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이라는 것은 ‘공포’에 가까운 것입니다. 공포라는 것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 앞에서 우리의 무지로 인해서 느끼는 것이지요. 어두운 밤에 들리는 발자국 소리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생각에서 비롯되는 공포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 발자국 소리의 주인공이 자신의 사랑하는 아버지라는 것을 이해하기 직전까지는 그러하지요. 하느님 앞에서의 공포는 우리가 그분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생겨나는 결과물인 셈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만드셨고 기르셨고 또 넘어진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지요. 그것도 몇 번씩이나 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계속 ‘두려움’을 느끼려고 합니다.
다른 한 편, 앞서 언급한 두려움을 느껴야만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모르고 자신의 욕구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도리어 스스로를 하느님의 충실한 제자로 내세우면서 사람들 앞에서 권력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하느님 두려운 줄을 알아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준비된 진노의 잔을 한방울도 남김없이 다 마셔야 할 것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1요한 4,18)
사랑은 오직 한 분에게서 그 출처를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시지요. 그분은 오로지 ‘사랑’ 뿐입니다.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지금 말하는 두려움은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는 ‘두려움’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 합당한 경외심을 가지는 것이 맞습니다. 그분의 위대함과 무한함 앞에서 우리는 마땅히 두려운 마음이 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이라는 것은 ‘공포’에 가까운 것입니다. 공포라는 것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 앞에서 우리의 무지로 인해서 느끼는 것이지요. 어두운 밤에 들리는 발자국 소리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생각에서 비롯되는 공포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 발자국 소리의 주인공이 자신의 사랑하는 아버지라는 것을 이해하기 직전까지는 그러하지요. 하느님 앞에서의 공포는 우리가 그분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생겨나는 결과물인 셈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만드셨고 기르셨고 또 넘어진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지요. 그것도 몇 번씩이나 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계속 ‘두려움’을 느끼려고 합니다.
다른 한 편, 앞서 언급한 두려움을 느껴야만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모르고 자신의 욕구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도리어 스스로를 하느님의 충실한 제자로 내세우면서 사람들 앞에서 권력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하느님 두려운 줄을 알아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준비된 진노의 잔을 한방울도 남김없이 다 마셔야 할 것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1요한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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