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 자체로 실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유한 영역을 지니고 있고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적지 않은 오해가 섞여 있는 부분입니다. 이런 예를 들 수 있겠습니다.
어떤 아이가 엄마와 이야기를 합니다. 어쩌다보니 엄마가 아이가 학교에서 금방 배워온 사실 하나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그 순간 자기가 엄마보다 ‘우월하다’고 느끼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정보’ 하나를 더 알고 있다고 해서 아이가 엄마보다 급상승하는 게 아닙니다. 엄마는 지식적으로 부족할 수는 있겠지만 실천적인 체험이 더 많지요. 공동체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은 저마다 자신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윤리적 우월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심판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지 우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일을 분별할 수 있고 옳고 그름을 알고는 있지만 상대를 ‘심판’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심판하는 분은 오직 아버지이고 우리는 모두 형제입니다.
사실 남보다 나은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통상적인 분별로는 그런 이들을 알아차리기 힘들 것입니다. 그들은 ‘사랑’이 뛰어난 이들, 하느님을 닮은 이들입니다. 그들의 넓은 품은 외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숨쉬는 공기를 알아차리지 못하듯이 그들의 사랑은 ‘원래부터 있던 것’으로 인지됩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 더욱 소홀히 하지요. 아니, 심한 경우에는 당연한 권리라고 착각해 버립니다. 그런 취급을 받으면서도 그들은 항의하지 않습니다. 그마저도 받아들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월등히 뛰어난 이들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낮은 곳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 이들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러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마음이 낮은 것을 선호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남보다 낫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우리가 남보다 낫다고 착각하는 그만큼 오히려 남보다 더 미천한 존재가 되기를 자청하는 것이지요.
어떤 아이가 엄마와 이야기를 합니다. 어쩌다보니 엄마가 아이가 학교에서 금방 배워온 사실 하나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그 순간 자기가 엄마보다 ‘우월하다’고 느끼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정보’ 하나를 더 알고 있다고 해서 아이가 엄마보다 급상승하는 게 아닙니다. 엄마는 지식적으로 부족할 수는 있겠지만 실천적인 체험이 더 많지요. 공동체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은 저마다 자신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윤리적 우월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심판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지 우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일을 분별할 수 있고 옳고 그름을 알고는 있지만 상대를 ‘심판’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심판하는 분은 오직 아버지이고 우리는 모두 형제입니다.
사실 남보다 나은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통상적인 분별로는 그런 이들을 알아차리기 힘들 것입니다. 그들은 ‘사랑’이 뛰어난 이들, 하느님을 닮은 이들입니다. 그들의 넓은 품은 외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숨쉬는 공기를 알아차리지 못하듯이 그들의 사랑은 ‘원래부터 있던 것’으로 인지됩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 더욱 소홀히 하지요. 아니, 심한 경우에는 당연한 권리라고 착각해 버립니다. 그런 취급을 받으면서도 그들은 항의하지 않습니다. 그마저도 받아들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월등히 뛰어난 이들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낮은 곳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 이들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러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마음이 낮은 것을 선호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남보다 낫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우리가 남보다 낫다고 착각하는 그만큼 오히려 남보다 더 미천한 존재가 되기를 자청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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