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굉장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는 우리 안의 ‘좋고 싫음’이 작용을 하고 그 뒤에 이성과 논리를 찾는 것이 순서입니다. 인간은 온전히 추상적인 존재가 되지 않는 이상은 늘 현재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지상의 것과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부터 모든 것의 소스를 얻고 분별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어린 시절 고양이에 대해서 아주 지독한 기억을 품고 있는 사람은 뉴스를 접하더라도 고양이에 대한 긍정적인 뉴스보다는 부정적인 뉴스에 더 관심을 갖고 지켜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양이 부정론자’가 되고 마는 것이지요.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하느님은 증명될 수도 없고, 부정될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가능성’을 넘어서서 계신 분이시지요. 그러기에 하느님이시구요. 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살아오면서 직접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하느님에 대한 것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저한 무신론자가 되거나 열정적인 호교론자가 되는 것이지요. 물론 그렇게 절대적인 수준까지 가지도 않습니다. 얼마간 생각하다가 그만두어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신앙은 이러한 인간의 첫 ‘느낌’을 넘어서는 것이고, 심지어는 ‘이성’도 넘어서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의지적 선택’과 긴밀하게 연관지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걸 바탕으로 나머지 모든 것을 쌓는 작업을 하는 것이지요. 물론 우리가 선택한다고 하느님이 생겨나고 우리가 선택한다고 하느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볼리비아에 망고가 썩어난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고 거부한다고 해서 실제로 썩고 있는 망고들이 사라지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근본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을 바탕으로 나머지 것들을 구축해야 합니다. 바로 그 근본의 선택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을 다 외우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하느님을 믿으십니까? 그분의 존재를 받아들이기로 선택을 하셨나요? 그렇다면 거기에서부터 나머지 모든 것들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차지도 덥지도 않은 이들이 있어서 세상과 하느님 사이에서 여전히 줄당기기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차라리 차거웠다면 그 지독한 차가움 속에서 오히려 온기를 그리워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 고양이에 대해서 아주 지독한 기억을 품고 있는 사람은 뉴스를 접하더라도 고양이에 대한 긍정적인 뉴스보다는 부정적인 뉴스에 더 관심을 갖고 지켜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양이 부정론자’가 되고 마는 것이지요.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하느님은 증명될 수도 없고, 부정될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가능성’을 넘어서서 계신 분이시지요. 그러기에 하느님이시구요. 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살아오면서 직접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하느님에 대한 것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저한 무신론자가 되거나 열정적인 호교론자가 되는 것이지요. 물론 그렇게 절대적인 수준까지 가지도 않습니다. 얼마간 생각하다가 그만두어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신앙은 이러한 인간의 첫 ‘느낌’을 넘어서는 것이고, 심지어는 ‘이성’도 넘어서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의지적 선택’과 긴밀하게 연관지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걸 바탕으로 나머지 모든 것을 쌓는 작업을 하는 것이지요. 물론 우리가 선택한다고 하느님이 생겨나고 우리가 선택한다고 하느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볼리비아에 망고가 썩어난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고 거부한다고 해서 실제로 썩고 있는 망고들이 사라지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근본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을 바탕으로 나머지 것들을 구축해야 합니다. 바로 그 근본의 선택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을 다 외우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하느님을 믿으십니까? 그분의 존재를 받아들이기로 선택을 하셨나요? 그렇다면 거기에서부터 나머지 모든 것들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차지도 덥지도 않은 이들이 있어서 세상과 하느님 사이에서 여전히 줄당기기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차라리 차거웠다면 그 지독한 차가움 속에서 오히려 온기를 그리워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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