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착한 일을 한다면서 ‘악을 조장’하기도 합니다. 착한 일을 하는 것이 도리어 악의 근원이 되는 것이지요. 너무나 착한 나머지 그 착함을 따라오지 못하는 이들을 비난하기 시작할 때가 바로 그렇습니다.
착하지 않은 착한 일을 하는 이들입니다. 진정한 착함은 남이 비난받게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이 나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을 감수합니다. 우리는 이 착함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죄인’으로 취급받은 사실을 이해하기 힘든 이유가 바로 여기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착한 척을 했다면 온갖 칭찬이 난무했을 것인데 예수님은 스스로 죄인 취급을 당하게 모든 것을 내버려 두셨습니다. 이건 상선벌악이라는 정당한 원칙에 어긋나도 한참을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상벌에 대한 개념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사회에서 칭찬은 상입니다. 하지만 영원의 세계에서 어리석은 이들의 칭찬은 모욕에 불과합니다. 이해가 되시는지요?
구체적인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아이가 쿠키를 5개 들고 있는데 하나를 흘렸습니다. 흙이 묻은 걸 다시 주워 들고 있다가 자신이 4개를 먹고 남은 하나, 바로 흙이 묻은 그 하나를 버리는 겸 다른 아이에게 보란 듯이 주었습니다. 선생님들은 그 아이를 ‘나눌 줄 아는 아이’로 칭찬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전혀 ‘착하지 않은 착한 일’인 셈이지요.
헌데 이 아이는 ‘칭찬’에 맛을 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착한 아이’가 되기로 결심을 합니다. 하지만 사실 그 ‘착함’이라는 것은 본질적인 의미의 착함이 아니라 ‘명예로움’의 착한아이 버전일 뿐입니다. 그 아이는 착함으로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는 것이지요.
이 아이는 착한 행동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착한 행동은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신에게 칭찬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 아이의 교만은 한껏 드높아지고 그럴수록 자신의 착함에 대한 집착은 더욱 커지며 주변의 탄성도 더욱 커집니다. 어른들은 모두 그 아이를 착하다고 추켜세우고 그 아이는 더욱 기고만장해지고 맙니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그 아이의 역으로의 행동이 시작됩니다. 그 아이는 주변의 ‘착하지 못한 아이들’을 비난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면 자신이 실천하는 착함의 수준을 따라오지 못하는 평범한 아이들을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무시하고 깔보고 빈정대기 시작하지요. 그렇게 그 아이들은 ‘나쁜 아이’, 착함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나쁜 아이가 되고 자신 홀로 착한 아이의 기준 너머에 서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착함, 진정한 선함은 때로는 굴욕을 감수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아주 훌륭한 모범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가장 선한 분이셨는데 우리 가운데에서 죄인으로 판명받아 십자가의 죽음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정말 착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게으르고 악한 자로 분류되고, 정말 게으르고 악한 사람이 ‘착한 사람’이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착하지 않은 착한 일을 하는 이들입니다. 진정한 착함은 남이 비난받게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이 나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을 감수합니다. 우리는 이 착함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죄인’으로 취급받은 사실을 이해하기 힘든 이유가 바로 여기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착한 척을 했다면 온갖 칭찬이 난무했을 것인데 예수님은 스스로 죄인 취급을 당하게 모든 것을 내버려 두셨습니다. 이건 상선벌악이라는 정당한 원칙에 어긋나도 한참을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상벌에 대한 개념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사회에서 칭찬은 상입니다. 하지만 영원의 세계에서 어리석은 이들의 칭찬은 모욕에 불과합니다. 이해가 되시는지요?
구체적인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아이가 쿠키를 5개 들고 있는데 하나를 흘렸습니다. 흙이 묻은 걸 다시 주워 들고 있다가 자신이 4개를 먹고 남은 하나, 바로 흙이 묻은 그 하나를 버리는 겸 다른 아이에게 보란 듯이 주었습니다. 선생님들은 그 아이를 ‘나눌 줄 아는 아이’로 칭찬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전혀 ‘착하지 않은 착한 일’인 셈이지요.
헌데 이 아이는 ‘칭찬’에 맛을 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착한 아이’가 되기로 결심을 합니다. 하지만 사실 그 ‘착함’이라는 것은 본질적인 의미의 착함이 아니라 ‘명예로움’의 착한아이 버전일 뿐입니다. 그 아이는 착함으로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는 것이지요.
이 아이는 착한 행동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착한 행동은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신에게 칭찬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 아이의 교만은 한껏 드높아지고 그럴수록 자신의 착함에 대한 집착은 더욱 커지며 주변의 탄성도 더욱 커집니다. 어른들은 모두 그 아이를 착하다고 추켜세우고 그 아이는 더욱 기고만장해지고 맙니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그 아이의 역으로의 행동이 시작됩니다. 그 아이는 주변의 ‘착하지 못한 아이들’을 비난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면 자신이 실천하는 착함의 수준을 따라오지 못하는 평범한 아이들을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무시하고 깔보고 빈정대기 시작하지요. 그렇게 그 아이들은 ‘나쁜 아이’, 착함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나쁜 아이가 되고 자신 홀로 착한 아이의 기준 너머에 서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착함, 진정한 선함은 때로는 굴욕을 감수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아주 훌륭한 모범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가장 선한 분이셨는데 우리 가운데에서 죄인으로 판명받아 십자가의 죽음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정말 착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게으르고 악한 자로 분류되고, 정말 게으르고 악한 사람이 ‘착한 사람’이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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