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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살펴보기

때로는 기초가 필요하겠지요? 그래서 한 번 돌아가봅시다.

기본상태
사람이 바쁜 생활이 이어지면 자연 정신이 ‘멍~’해집니다. 그리고 아무런 의욕이 없는 상태에 이르지요. 하지만 ‘영적 의욕’이 없다는 말이지 아무런 욕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욕구가 생생하게 살아있지요. 더 많은 것을 취하고 싶은 욕구가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욕구의 근본에는 ‘이기심’이 상존하고 있지요. 내가 세상의 중심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취해야 하고 그렇기에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얻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욕구를 충족시켜줄 최고봉은 바로 ‘돈’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멍한 상태에서는 언제나 자연스러이 ‘돈욕심’이 내면을 가득 채우고 있게 됩니다.

갈증
사람은 목이 마르면 물을 찾습니다. 하지만 그 갈증을 느끼지 못한다면? 결코 물을 찾지 않을 겁니다. 때로는 그 갈증을 오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실제로는 목이 마른데 배가 고프다고 착각을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밥을 열심히 먹지만 목은 오히려 더 마를 뿐입니다. 중독된 상태도 있어서 목이 마른데 좋아하는 탄산음료만 들이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목은 두배로 말라오기만 합니다. 엉뚱한 갈증을 느끼고 엉뚱한 것을 들이켜서 갈증은 전혀 해소되지 않는 상태로 영혼은 더욱 메말라갑니다.

시도
이러한 상태에서 사람들은 여러가지 시도를 합니다. 물론 일단 갈증을 느끼고 그것을 해소할 방도를 마련한다는 가정으로 넘어온 셈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시도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염경기도, 신심 프로그램 참여, 성경읽기, 평일미사 등등의 다양한 것이 있습니다. 다행히 이러한 것들로 시동이 걸려서 길을 찾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셈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런 시도들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금 해 보다가 ‘역시 나는 안되는구나’하고 제풀에 포기해 버리고 맙니다.

끈기
문제는 방법이 잘못된 것이라기보다 내 안에 ‘끈기’가 없는 것입니다. ‘인내’라고도 표현하는 것이지요. 위에 언급한 모든 방법은 나름대로 좋은 것들입니다. 끈기만 있다면 어떤 방법을 택하더라도 반드시 진보가 있을 방법들이지요.

중간 점검
갈증을 느끼지 못하는 멍한 상태, 시도하지 않는 게으름, 존재하지 않는 끈기…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영적 여정을 방해합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이러한 상태에 있다면 자신의 위치가 어딘지 알아차리고 다시 길을 나서야 할 것입니다.

시련
궤도에 오른 이들에게는 전혀 다른 시련들이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 시련들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다르게 다가옵니다. 교만한 이에게는 겸손, 탐욕스런 이에게는 절제, 지나치게 의로움에 집착하는 이에게는 온유… 저마다의 시련 속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가치들을 습득하게 되지요. 그래서 이 부분에서는 각자가 다른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자유와 깨달음
하지만 대부분이 거치게 되는 과정 중에 유념해야 할 것으로는 ‘자유로움’에 관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스스로를 구속하기 때문이지요. 내가 설정하고 만든 틀에 나 자신을 가두어 두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짓 기만으로 우리를 속여 우리가 그 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합니다. 그 꺼풀을 벗겨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을 위해서는 ‘깨달음’이 필요하지요. 알아야 바라보고 벗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보다 깊은 인내
우리는 이 여정을 죽기 직전까지 해야 합니다. 어쩌면 죽고 나서도 우리 앞에는 길이 놓여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인내’라는 덕은 언제나 필요한 것입니다. 참아 견디지 못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너는 죽기까지 충실하여야 한다.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월계관을 네게 주겠다.(묵시룩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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