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체험 있으신가요? 누군가를 오해해서 그를 죽도록 증오했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된 후에 뒤늦게 그에게 사과해야 하는데 자존심 때문에 사과를 미루고 미루고 미루어 보신 적?
사실 우리는 ‘이유가 있어서’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합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이유가 있어도 누군가를 증오하고 미워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이유 때문에 누군가를 증오한다는 공식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뿐입니다. 심지어는 누가 내 목숨을 빼앗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 우리 스승님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지요.
우리는 누군가를 미워할 이유, 또는 타당성이 없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그 누구든 용서해야 할 의무, 당위성이 있습니다.하지만 이를 깨닫기까지 정말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 그럼 당장 드는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축약하면 다음과 같지요.
“누군가가 계속해서 잘못을 저지르는데 우리는 그를 용서해야 하나요?”
이는 ‘용서’라는 것을 잘못 이해한 데에서 나오는 의문입니다. 용서는 사랑의 최상급의 표현입니다. 용서는 상대를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그가 나에게 행한 악을 사랑으로 감싸 안는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말이 곧 그가 저지르는 죄악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방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가 잘 되는 방향으로 도와 주어야 합니다. 그가 악습을 지니고 있다면 그 악습을 고칠 수 있는 방향으로 도와주어야 하지요. 그 악습을 계속해서 저지르게 놓아둔 채로 그를 용서한다는 것은 ‘무책임’과 ‘나태함’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그를 고쳐 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것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만용입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 예컨대 상대가 저지른 오류를 내가 감싸안는 것은 내가 어찌해 볼 수 있는 문제이지만 상대의 자유의지가 선에로 완전히 돌아서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참 미묘한 문제입니다.)
하나만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용서는 사랑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사랑은 막연한 옹호가 아니라 ‘의로움’이 깃든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하기도 전에 이성과 논리가 가득한 ‘의로움’의 칼을 들고 와서 상대를 난도질합니다. 그래서 용서가 더욱 힘든 것입니다.
용서가 쉽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용서는 분명히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유가 있어서’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합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이유가 있어도 누군가를 증오하고 미워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이유 때문에 누군가를 증오한다는 공식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뿐입니다. 심지어는 누가 내 목숨을 빼앗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 우리 스승님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지요.
우리는 누군가를 미워할 이유, 또는 타당성이 없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그 누구든 용서해야 할 의무, 당위성이 있습니다.하지만 이를 깨닫기까지 정말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 그럼 당장 드는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축약하면 다음과 같지요.
“누군가가 계속해서 잘못을 저지르는데 우리는 그를 용서해야 하나요?”
이는 ‘용서’라는 것을 잘못 이해한 데에서 나오는 의문입니다. 용서는 사랑의 최상급의 표현입니다. 용서는 상대를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그가 나에게 행한 악을 사랑으로 감싸 안는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말이 곧 그가 저지르는 죄악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방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가 잘 되는 방향으로 도와 주어야 합니다. 그가 악습을 지니고 있다면 그 악습을 고칠 수 있는 방향으로 도와주어야 하지요. 그 악습을 계속해서 저지르게 놓아둔 채로 그를 용서한다는 것은 ‘무책임’과 ‘나태함’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그를 고쳐 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것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만용입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 예컨대 상대가 저지른 오류를 내가 감싸안는 것은 내가 어찌해 볼 수 있는 문제이지만 상대의 자유의지가 선에로 완전히 돌아서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참 미묘한 문제입니다.)
하나만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용서는 사랑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사랑은 막연한 옹호가 아니라 ‘의로움’이 깃든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하기도 전에 이성과 논리가 가득한 ‘의로움’의 칼을 들고 와서 상대를 난도질합니다. 그래서 용서가 더욱 힘든 것입니다.
용서가 쉽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용서는 분명히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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