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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선언

주님께서는 오늘 너희를 두고 이렇게 선언하셨다. 곧 주님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그분 소유의 백성이 되고 그분의 모든 계명을 지키며, 그분께서는 너희를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민족들 위에 높이 세우시어, 너희가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받게 하시고,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분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신명 26,18-19)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의 소유로 삼으실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계명을 지키도록 이끌어 주실 것을 약속하셨지요. 나아가 우리를 드높여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찬양, 명성, 영화’를 받게 하시고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분의 약속은 진실하시며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이루어지지 않고 돌아가지 않으며 그분께 의탁하는 모든 이들에게 들어가서 반드시 뜻을 성취하고야 맙니다.

하느님은 단 한번도 거짓을 내뱉으신 적이 없기에 그분이 하는 말은 모두 진실하십니다. 여기에는 추호도 의심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의심하고 또 의심합니다. 이미 약속된 것을 의심하여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나아가 우리 스스로도 그 약속에서 벗어납니다. 우리는 믿지 못해서 스스로를 내던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늘 양다리를 걸치고 삽니다.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지 못하고 반대로 엉뚱한 약속들을 믿습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광고는 우리가 그대로만 따라하면 행복해 질 것을 말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거짓말입니다. 보험을 100개를 든다고 해서 그 사람이 안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안정이라는 것은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할 때에 주어지는 것이고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의 삶을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로 드러내셨을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약속을 믿지 못했고 그분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지식적으로만’ 알 뿐 실제의 삶으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불안하고 안정적이지 못한 공허한 마음을 지니고 사는 것입니다.

당신이 드높이시는 백성이라는 표현의 이면에는 ‘머물러 있는 민족’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들도 하느님께서 만드신 민족이지만 그들은 드높여지지 않습니다. 하느님게서 만드신 모든 민족이 들어높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이 만들었지만 하느님을 거부한 민족, 하느님을 외면한 민족, 하느님을 무시한 수많은 민족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의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눈 앞에 선택지를 놓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 역시도 하찮은 그 수많은 민족으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하느님의 민족이 되어 그분이 약속하시는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입고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인지는 바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하느님의 선언은 진실하며 반드시 이루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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