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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상

너희는 중상하러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 (레위 19,16)

남을 험담하는 것, 그에 대해서 확실히 모르면서 그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는 것, 그리고 그 목적은 그가 낮춰지기를 바라는 것, 그리고 그 이면에 내가 높아지기를 바라는 것.

중상이라는 것의 숨겨진 면모들입니다. 우리는 곧잘 이런 일들을 많이 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그를 향한 ‘열등감’이 알게 모르게 숨어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보다 하수를 보면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합니다.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별 수 없다는 것을 알면 오히려 동정심을 느끼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가 조금이라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면 우리의 열등감이 발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를 공격할 수단을 찾게 되지요.

그리고 가장 쉬운 방법은 ‘말’입니다. 우리는 주변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을 전하기 시작하지요. 그리고 가능한 그 말속에 자신의 의도를 담습니다. 의도 없이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하는 말에 ‘의도’를 담게 마련입니다. 사람을 살리려는 사람이 있고, 사람을 해치려는 사람이 있고, 자신을 드높이려는 사람이 있고, 자신을 드높이기 위해 다른 이를 깎아 내리려는 사람이 있지요.

그 가운데 ‘중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남을 깎아 내려 최종적으로 자신을 높이는 행위이지요. 참으로 사악한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기 있다는 연예인에 대해서 그런 일들을 알게 모르게 하고 있으며 우리 주변 사람들을 ‘씹으면서’ 그런 일들을 심심찮게 하곤 합니다.

중상을 하면 안됩니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중상을 하는 본인에게 ‘영적으로’ 위험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중상을 하는 사람은 두 가지 방향의 잘못을 범하는 것이지요. 하나는 주변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제로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과장된 일을 더하기에 ‘거짓 증언’을 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자기 자신을 향해서 ‘교만’과 ‘증오’를 더하는 일입니다.

중상을 하고 다니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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