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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

한 사람이 태어나고 죽기까지 누구나 접하는 것이 ‘의문’입니다. 아주 어린 시절의 단순한 호기심으로부터 시작해서 나이가 들어 복잡 다단하고 은밀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의문’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가 기다리는 것은 ‘대답’입니다. 의문에 대한 대답이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경우에 대답은 ‘외부로부터’ 주어지곤 합니다.

- 엄마, 이 꽃은 이름이 뭐야?
- 응, 이 꽃은 민들레라고 해.
- 왜?
- …

여기서 엄마는 말문이 막힙니다. 민들레를 왜 민들레라 부르는지 엄마는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엄마는 다른 이가 전해 준 지식을 다시 전해주었을 뿐, 본인 스스로 그 이유를 성찰해 본 적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배워 얻은 지식과 나 자신에게서 일구어낸 지혜가 존재합니다. 지식은 얼마든지 책을 통해서 누군가의 글과 말을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시대의 가장 지혜로운 존재는 인터넷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인터넷은 인격체가 아니지요.

우리가 ‘사람’인 이유는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겨난 의문에 의연하게 대처하고 나름대로 고민을 해고 직접 체험함으로 인해서 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의문은 단순히 외부로부터 답을 구해서는 안됩니다. 때로는 내가 실제로 겪어보고 알아보아야 답이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여행을 다니고 문물을 많이 보아서 지식적으로 충만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대하고 다가오는 여러가지 상황들 안에서 ‘지혜’를 얻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얻은 지혜를 남에게 전해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전달 방식은 지식을 전하는 것과는 전혀 딴판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선택하고 그들이 체험할 수 있게 이끌어갑니다. 말로 전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사랑하는 이들이 지혜에 나아가게 도와주는 것이지요.

그렇게 체득된 지혜는 한 사람을 성장시킵니다. 그리고 지혜는 또 다른 지혜를 이끌어들이지요. 그렇게 한 인간은 의문에서 자유로워져 ‘지혜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지혜는 무엇일까요?

하느님을 아는 것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아마 이 글을 처음부터 읽다가 막판에 ‘이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는거지?’라고 생각하실 분이 있을리라 생각합니다. 전혀 신앙과 상관없을 듯한 논조로 이야기를 하다가 뜬금없이 하느님 이야기를 시작하니 그럴 만도 하지요.

하지만 이는 진리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것이 모든 지혜의 시작힙니다. 그분을 알지 못하고 얻는 것들은 기초 없이 세워진 집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궤변론자가 될 수는 있어도 참다운 지혜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절대자를 향한 사랑 없이 인간은 올바로 서 있을 수 없으며 자신이 구축하는 대부분의 것은 허상의 껍데기를 탐구하는 것일 뿐입니다.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은 ‘하느님’에게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 그분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이는 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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