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두 관점은 외면과 내면의 차이입니다. 특히나 성과 관련해서 적지 않은 이들이 혼동하는 영역입니다. 사람들은 무결함에 대해서 자주 다투곤 합니다. ‘혼전 순결’이라는 것을 한 번도 파괴되지 않은 처녀성과 연관해서 생각하려 하지요.
인간의 정결은 그런 외적인 현상으로 분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흙먼지가 가득한 운동장에서 논다면 나의 몸은 더러워지겠지만 마음은 더러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외적인 것을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다루는가가 보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먼저 실제적인 현상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많은 연인들이 만나고 불타오르고 서로의 ‘성(性)’을 탐구합니다. 마치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둘은 어느새 한 몸을 이루어버리고 맙니다. 물론 전부가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독실한 신앙인들 가운데에는 결혼 적령기에 이르고, 결혼 직전까지도 스스로의 외적인 성적 순결을 철저하게 지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한 부분입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의 수많은 청년들은 혼인 이전에 누군가의 성관계를 체험하는 것이지요.
가톨릭 교회의 의견은 익히 알고들 있습니다. ‘결혼 전까지 정결함을 유지하라’는 것이지요. 과연 교회의 걱정은 무엇일까요?
교회는 하느님의 뜻을 소중히 여기고, ’생명’과 ‘혼인’을 참으로 소중히 여깁니다. 이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부분이지요. 그래서 교회는 ‘성性’에 관해서는 엄격함을 유지하고 ‘혼인’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생명과 관계가 소홀히 다루어지는 일을 예방하기 위해서이지요.
교회의 이러한 노력이 나쁜 게 아닙니다. 교회의 근본 의도는 이렇게 아름답고 좋은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현실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교회가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특히나 교회 안에서 강조되어 온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독신생활’은 심지어 성 자체를 터부시하는 결과까지 가져오고 만 것이지요.
이제 슬슬 본론으로 접어들어야 하겠습니다.
성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성은 하느님께서 원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어 둘이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는 당신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죄악은 이를 파괴해 버립니다. 인간은 하나의 배우자에 만족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 이유는 다양하지만 결국은 하느님의 뜻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저마다의 이기심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성적 쾌락이 부족해서, 배우자의 성격이 자신과 맞지 않아서 사람들은 배우자를 만나고 바꾸고를 반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또다른 죄악이 탄생하기 시작합니다. 즉, 축복받지 못한 파괴된 관계 안에서 태어난 새로운 영혼들이 머무를 곳을 찾지 못하고 또다시 파괴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태어나기도 전에 ‘낙태’라는 행위를 통해서 아예 파멸시켜 버리기도 합니다.
이러한 행위들이 하느님 보시기에 추악해 보였던 것입니다. 당신이 조성한 관계를 파괴하고, 당신이 선물한 생명을 파괴하는 인간들은 스스로 저주를 끌어당기는 셈입니다.
혼전 성관계라는 것은 이 두 부적절함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혼전 성관계라는 것은 제 나름대로는 ‘사랑’이라는 말로 포장하겠지만 결국 완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두 인간의 쾌락을 위한 결합이고, 새로운 생명의 탄생의 가능성과 그에 대한 무책임함을 품고 있는 것이지요.
‘사랑하면 관계를 가질 수 있다.’라는 표현은 언뜻 로맨틱하고 아름다워보이지만 저는 묻겠습니다. 정말 사랑이 뭔지를 알고 사랑한다고 하는 것인지 말이지요. 과연 상대가 지금처럼 매력적이지도 않고, 이런 저런 성격적 결함이 드러나더라도 과연 그를 꾸준히 사랑할 굳은 의지가 있는지 말이지요.
적어도 ‘혼인’, 특히나 교회 안에서의 ‘혼인’이라는 것은 두 사람의 동의와 서약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그나마 ‘안정성’을 획득하는 셈입니다. 특히나 가톨릭 교회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진 결합은 절대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 서약은 더욱 진지한 것이 됩니다.
이 글을 읽을 분들은 보호자의 도움이 필요한 어린아이들이 아닐 것입니다. 스스로 분별하고 선택할 수 있는 어른들이리라 생각합니다. 아직 혼인을 하지 않은 적령기의 성인이 있으시다면 잘 성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혼전 순결에 대한 주제에 있어서 ‘관계를 가졌는가 아닌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나는 진정한 책임감으로 그녀를 대하고 있는가 아닌가를 물어야 합니다. 성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결함’이 아니라 ‘정결함’입니다.
인간의 정결은 그런 외적인 현상으로 분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흙먼지가 가득한 운동장에서 논다면 나의 몸은 더러워지겠지만 마음은 더러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외적인 것을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다루는가가 보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먼저 실제적인 현상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많은 연인들이 만나고 불타오르고 서로의 ‘성(性)’을 탐구합니다. 마치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둘은 어느새 한 몸을 이루어버리고 맙니다. 물론 전부가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독실한 신앙인들 가운데에는 결혼 적령기에 이르고, 결혼 직전까지도 스스로의 외적인 성적 순결을 철저하게 지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한 부분입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의 수많은 청년들은 혼인 이전에 누군가의 성관계를 체험하는 것이지요.
가톨릭 교회의 의견은 익히 알고들 있습니다. ‘결혼 전까지 정결함을 유지하라’는 것이지요. 과연 교회의 걱정은 무엇일까요?
교회는 하느님의 뜻을 소중히 여기고, ’생명’과 ‘혼인’을 참으로 소중히 여깁니다. 이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부분이지요. 그래서 교회는 ‘성性’에 관해서는 엄격함을 유지하고 ‘혼인’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생명과 관계가 소홀히 다루어지는 일을 예방하기 위해서이지요.
교회의 이러한 노력이 나쁜 게 아닙니다. 교회의 근본 의도는 이렇게 아름답고 좋은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현실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교회가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특히나 교회 안에서 강조되어 온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독신생활’은 심지어 성 자체를 터부시하는 결과까지 가져오고 만 것이지요.
이제 슬슬 본론으로 접어들어야 하겠습니다.
성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성은 하느님께서 원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어 둘이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는 당신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죄악은 이를 파괴해 버립니다. 인간은 하나의 배우자에 만족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 이유는 다양하지만 결국은 하느님의 뜻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저마다의 이기심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성적 쾌락이 부족해서, 배우자의 성격이 자신과 맞지 않아서 사람들은 배우자를 만나고 바꾸고를 반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또다른 죄악이 탄생하기 시작합니다. 즉, 축복받지 못한 파괴된 관계 안에서 태어난 새로운 영혼들이 머무를 곳을 찾지 못하고 또다시 파괴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태어나기도 전에 ‘낙태’라는 행위를 통해서 아예 파멸시켜 버리기도 합니다.
이러한 행위들이 하느님 보시기에 추악해 보였던 것입니다. 당신이 조성한 관계를 파괴하고, 당신이 선물한 생명을 파괴하는 인간들은 스스로 저주를 끌어당기는 셈입니다.
혼전 성관계라는 것은 이 두 부적절함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혼전 성관계라는 것은 제 나름대로는 ‘사랑’이라는 말로 포장하겠지만 결국 완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두 인간의 쾌락을 위한 결합이고, 새로운 생명의 탄생의 가능성과 그에 대한 무책임함을 품고 있는 것이지요.
‘사랑하면 관계를 가질 수 있다.’라는 표현은 언뜻 로맨틱하고 아름다워보이지만 저는 묻겠습니다. 정말 사랑이 뭔지를 알고 사랑한다고 하는 것인지 말이지요. 과연 상대가 지금처럼 매력적이지도 않고, 이런 저런 성격적 결함이 드러나더라도 과연 그를 꾸준히 사랑할 굳은 의지가 있는지 말이지요.
적어도 ‘혼인’, 특히나 교회 안에서의 ‘혼인’이라는 것은 두 사람의 동의와 서약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그나마 ‘안정성’을 획득하는 셈입니다. 특히나 가톨릭 교회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진 결합은 절대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 서약은 더욱 진지한 것이 됩니다.
이 글을 읽을 분들은 보호자의 도움이 필요한 어린아이들이 아닐 것입니다. 스스로 분별하고 선택할 수 있는 어른들이리라 생각합니다. 아직 혼인을 하지 않은 적령기의 성인이 있으시다면 잘 성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혼전 순결에 대한 주제에 있어서 ‘관계를 가졌는가 아닌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나는 진정한 책임감으로 그녀를 대하고 있는가 아닌가를 물어야 합니다. 성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결함’이 아니라 ‘정결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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