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2,25)
무죄한 이는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부끄러움, 수치심이라는 것은 숨기고 싶은 것이 있을 때에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래서 무죄한 어린 아이는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아장아장 걸어다니는 아이들은 옷을 벗겨 밖에 놓아 두어도 온 동네를 돌아다닙니다. 그들은 보여주는 것에 거리낌이 없으며 그들의 머릿속에는 ‘알몸 = 수치심’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수치심은 교육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어른들이 부끄럽다고 하니 부끄러운 줄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다른 방법으로도 수치심은 발생합니다. 그것은 바로 ‘숨기고 싶은 것이 생겨날 때’입니다.
아이들은 해서 안될 것 같은 일을 하고 나면 어른들의 눈치를 봅니다. 뭔가를 떨어뜨려 깨거나 망가뜨리고 나면 일단 스스로 놀라고 그리고 나서는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살핍니다. 그리고 주변의 반응을 통해서 수치심을 배우게 되는 것이지요.
인간이 몸을 가리기 시작하는 것은 죄를 짓고 나서부터입니다. 가리고 숨기고 싶은 것이 생겨난 것이지요. 자신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벌거벗더라도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가족입니다. 가족들은 같이 목욕탕에 들어가서 목욕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관계가 파괴되고 나면 서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니 하느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속속들이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우리가 그 관계를 파괴하고 하느님에게서 거리를 두면서 ‘수치심’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하느님 앞에 뭔가를 숨기고 싶다는 것을 반증하는 셈이지요.
하느님 앞에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십시오. 사랑은 부끄러움을 녹여냅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문화 속에서 살아왔지만 서로 옷을 벗고 상대를 맞아 들이게 됩니다. 사랑이 부끄러움을 없애는 것이지요.
무죄한 이는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부끄러움, 수치심이라는 것은 숨기고 싶은 것이 있을 때에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래서 무죄한 어린 아이는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아장아장 걸어다니는 아이들은 옷을 벗겨 밖에 놓아 두어도 온 동네를 돌아다닙니다. 그들은 보여주는 것에 거리낌이 없으며 그들의 머릿속에는 ‘알몸 = 수치심’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수치심은 교육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어른들이 부끄럽다고 하니 부끄러운 줄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다른 방법으로도 수치심은 발생합니다. 그것은 바로 ‘숨기고 싶은 것이 생겨날 때’입니다.
아이들은 해서 안될 것 같은 일을 하고 나면 어른들의 눈치를 봅니다. 뭔가를 떨어뜨려 깨거나 망가뜨리고 나면 일단 스스로 놀라고 그리고 나서는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살핍니다. 그리고 주변의 반응을 통해서 수치심을 배우게 되는 것이지요.
인간이 몸을 가리기 시작하는 것은 죄를 짓고 나서부터입니다. 가리고 숨기고 싶은 것이 생겨난 것이지요. 자신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벌거벗더라도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가족입니다. 가족들은 같이 목욕탕에 들어가서 목욕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관계가 파괴되고 나면 서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니 하느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속속들이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우리가 그 관계를 파괴하고 하느님에게서 거리를 두면서 ‘수치심’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하느님 앞에 뭔가를 숨기고 싶다는 것을 반증하는 셈이지요.
하느님 앞에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십시오. 사랑은 부끄러움을 녹여냅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문화 속에서 살아왔지만 서로 옷을 벗고 상대를 맞아 들이게 됩니다. 사랑이 부끄러움을 없애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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