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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말하기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마르7,37)

듣기와 말하기, 참으로 중요한 두 가지 활동입니다. 제대로 듣지 않으면 올바른 말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또 말을 똑바로 해야 상대가 잘 들을 수 있습니다. 긴밀하게 연관된 두 가지 활동이지요.

정말 많은 말을 쏟아내는 우리들입니다. 하루를 살면서 하는 말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말을 하는 사람만 말을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늘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려고 하고, 자신 안에 든 것을 쏟아내고 싶은 사람이 말을 합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런 이들 가운데에는 ‘들을 줄 모르는 이들’이 수두룩합니다.

들을 줄 모르는 그들이 하는 말은 ‘공허’합니다. 흐르는 물이 아니라 고인 물이기 때문입니다. 자신 안에 고여든 것을 매번 쏟아내기만 하니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그들이 쏟아내는 말의 근원은 자신의 욕구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말을 조금만 들어보면 그 욕구의 기원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돈, 명예, 권력, 건강과 같은 주제로 그들은 하루에도 수도없는 말들을 주고 받지만 그 말이 무언가를 바꾸지는 못합니다.

먼저는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귀머거리의 두 귀를 먼저 열어 주시고, 그 뒤에 혀를 만져 입을 열어 주신 순서가 되어야 합니다. 먼저는 귀를 기울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기에 우리는 인내가 얼마나 부족한지 모릅니다.

다음은 말하기입니다. 올바로 듣기 시작한 이후에는 ‘말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말하는 말하기는 이전까지의 것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말할 바를 알고 말하는 것이 말하기의 기본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말할 줄도 모르면서 말을 하기에 문제가 되지만, 말을 해야 하는 상황에 말을 하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희망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데 상대가 내가 가진 보물을 알기는 힘든 법입니다. 물론 우리의 삶으로 우리의 신앙을 증거해야 하지만 때가 되면 말을 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선포해야 하지요.

많은 이들이 이 부분에서 주저합니다. 분명 내가 가진 신앙은 좋은 것인데 그것을 섣불리 말하기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행여 상대가 어떻게 생각을 할까,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지 않을까 걱정을 하면서 결국 입을 닫아 버리고 맙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요나 예언자가 그대로 입을 닫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니네베는 자신이 지닌 죄악에서 돌이킬 기회도 얻지 못한 채로 모두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때가 되면 입을 열어야 하고, 해야 할 말을 해야 합니다. 상황이 좋든 나쁘든 주저하지 말고 우리가 지닌 희망을 말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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