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누군가를 비판할 때 주의해야 할 점

교도권에 화난 사람이 많다는 건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질 난다고 다 때려 치우라는 건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때로 적지 않은 신자분에게 있어 신부님이 맘에 들지 않는 것은 이해합니다. 좀 더 겸손했으면 좋겠지만 교만하고, 좀 더 검소했으면 좋겠지만 부유하고, 좀 더 진솔하고 사랑이 가득했으면 좋겠지만 형식적이고 행정적인 그 모습은 저도 한 명의 사제로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는,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바라본 본당 신부의 모습이 모든 사제의 모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자기 자리에서 정말 열심히 살아가는 신부님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비판은 그 잘못을 하는 당사자가 되어야 하고 그가 사랑과 애정 안에서 그것을 고칠 수 있는 형태가 되어야지 막연하게 대놓고 사목자 집단 전체를 매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도둑 고양이 한 마리가 자신의 집에 들어와 컵을 하나 깨었다고 고양이는 필요없으니 세상의 모든 고양이들을 멸종시켜야 된다는 것은 어리석은 논리입니다. 우리가 함부로 비난의 화살을 쏘는 중에 선의의 사람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을 늘 고려해야 합니다. 비판은 할 수 있지만 바람직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듭 강조하지만 잘못을 하는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되어 그가 그 잘못을 고치는 데에 도움을 주는 비판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이 좀 억울하다고 온 동네가 그를 미워하도록 조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둘째로, 그의 오류가 그의 직분 전체를 상하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직자가 온유하고 친절하고 검소하고 친근하면 참 좋겠지만 그런 만능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어느 부분에 오류를 지니고 있게 마련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저만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때로는 소극적이고 수줍어하고 외통수이며 고지식하기도 합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약점을 지니고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 약점이 그가 하는 일 전체를 망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못난 사제라도 미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그런 ‘미사’의 은총이라도 기다리는 목마른 영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어느 성인이 한 훌륭한 비유 중에 ‘우물을 퍼는 문둥이’라는 비유가 있습니다. 사제가 죄악이 극심하다고 해서 그가 퍼내는 우물물이 더러운 건 아닙니다. 사실 사제직 자체가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이 어찌보면 과분한 일입니다. 우리 가운데 죄인 아닌 사람은 없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은총은 전해지는 것입니다.

모쪼록 교회에 화가 나 있는 분들에게 다시 한 번 자신의 생각을 점검해 보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상대가 잘못을 하여 화가 난다고 주먹을 마구 휘두르면 어설프게 곁을 지나가던 죄없는 아이가 맞을 수 있고, 또 아무리 잘못을 하였다지만 주먹으로 얻어맞은 그는 더욱 화가 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준주성범

준주성범 라틴어로 씌어진 15세기의 신심서(信心書). 저자는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로 알려져 있다. 모두 4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편의 제목은 `영적 생활에 유익한 훈계'(Admonitiones ad spritualem vitam utiles), 2편의 제목은 `내적 생활을 지도하는 훈계'(Admonitiones ad interna trahentes), 3편의 제목은 `내적 위안을 얻는 법'(Liber internae consolationis), 4편의 제목은 `성체성사에 대한 훈계'(Devota exhortatio ad sacram communionem)이며, 1,2편은 주로 묵상과 기도로 이루어져 있고, 3,4편은 대화(對話)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인 생활의 기본원리들을 명백히 밝혀 주는 영신지도서로서 교회 신심에 많은 영향을 주어 일찍부터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냐시오(Ignatius de Royola)의 《영신수련》에 이용되었고, 또 17세기에 일어난 프로테스탄트의 경건주의(敬虔主義, pietismus)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이 한역(漢譯)한 《경세금서》(經世金書), 《준주성범》이 전해져 두 책 모두 한글로 번역 필사되었고, 1938년 연길교구의 차일라이스(V. Zeileis, 徐) 신부가 라틴어 원본을 번역한 《준주성범》이 간행되었으며 그 뒤 1954년 윤을수(尹乙洙) 신부가 새로 번역한 《준주성범》이 경향잡지사에서 간행되어 현재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성서 다음 많이 읽히는 책이다. 제1편 영적생활에 대한 유익한 훈계 제1장 그리스도를 본받음과 세상의 모든 헛된 것을 업신여김 1.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 (요한 8,12) 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그리스도 께서 우리를 훈계하시는 말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