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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여행

전혀 뜻하지 않은, 하지만 계획된 여행이었습니다.

시작은 이랬습니다. 볼리비아에서 페이스북으로 알게된 한 형제님이 당신이 인도네시아에 사신다고 소개를 하셨습니다. 들으면서 참 멀리도 사신다고 생각을 했지요. 헌데 형제님이 불쑥 초대를 해 주셨습니다.

“한번 놀러 오세요.”

그리고 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네 갈께요.”

사실 그때만 해도 지금의 휴가가 있으리라고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원래는 볼리비아 대주교님을 모시고 부활이 끝나고서야 한국에 들어갈 생각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고 휴가 계획이 수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연말에 휴가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선교사의 휴가는 또다른 ‘과업’이라는 것을 아는 저로서는 이번 휴가는 미리 큰 덩어리를 집어 넣기로 계획을 했습니다. 그리고 전에 받아 놓았던 초대를 떠올렸지요. 인도네시아의 형제님과 구체적인 계획 수립에 들어갔습니다. 곧 방문 계획이 잡혔지요. 넉넉하게 날짜를 잡고 오라는 말을 듣고 10일 정도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수많은 것들이 미지수였습니다. 어디에 머물지, 어디를 갈지 저로서는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었지요. 어찌보면 겁대가리가 없기도 한 것이었습니다. 생판 모르는 나라에 페이스북 친구 하나 믿고 불쑥 찾아가는 꼴이었으니까요. (물론 전적은 있습니다. 그렇게 호주를 방문한 적도 있지요. 그래도 거기는 영어를 쓰니까요. ㅋ)

약속 날짜가 다가왔고 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리고 도착하는 순간 제가 정말 다른 나라에 왔다는 느낌이 강하게 밀려왔습니다. ‘더위’와 ‘습한 공기’로 말이지요. 하지만 친근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볼리비아에서 익히 느끼던 것들이지요.

별다른 짐이 없었던 저는(심지어 속옷도 챙겨가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단벌 신사였지요.) 공항 수속대를 통과했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비가 오고 있더군요. 그리고 잠시 후 한 부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저를 초대한 분들이었지요.

우리는 처음 만났지만 오랜 친구마냥 거침이 없었습니다.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는 듯 하였지요. 사실이 그러했구요. 우리는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이 없지만 우리는 서로 깊은 곳에서부터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바로 ‘하느님’이 계셨지요.

집에 도착했고 그렇게 첫날 밤을 보냈습니다. 다음날부터 일정이 빡빡했습니다. 준비된 여행을 하느라 말이지요. 그렇게 메단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선교를 하시는 수녀님들을 만날 수 있었지요. 현지에서 성소를 받은 원주민 수녀님들과 함께 어울려 생활하시는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그리고 여행 가운데 또다른 페이스북 친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의 천사같은 아이들과 더불어서 말이지요. (하지만 잠잘 때만 천사이고 얼마나 장난꾸러기들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팀이 갖추어졌고 여행이 이루어졌습니다. 솔직히 어디가 어디인지는 아직도 모릅니다. 다만 비행기를 타고 날라가서 차를 타고 한참을 가서 어느 호숫가 아름다운 곳에서 머무르고 다음날은 호수를 건너 호수 안의 섬 안에 또 하루를 머물렀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모두 처음 보는 것들이고 이름도 생소해서 들어도 기억이 날 리가 없지요. 하지만 제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은 고스란히 제 영혼 안에 아로새겨져 있는 셈입니다. 특히나 가족 중에 막내 녀석의 재롱과 장난에 시간 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힐링’을 했습니다. 오전엔 주로 쉬고 오후에 살짝 나가는 식으로 하루 하루를 보냈지요. 정말 말 그대로 힐링이었습니다.

세번째로 만난 페이스북 친구는 신부님이셨습니다. 일찍부터 친구이긴 하였지만 인도네시아에서 사목하고 계시리라고는 상상을 못했는데 뒤늦게야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여행에서 합류한 가족의 초대를 받아 간 식사 자리에서 함께 인사를 나누고 음식을 나누었지요. 신부님은 참으로 재미난 분이셨습니다. 고향 땅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목을 하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도 모임 가운데에서 유쾌함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네번째로 페이스북 친구를 만났습니다. 자카르타 시내 관광과 더불어 말이지요. 시나리오 작가이신 그분과 한인니 문화원 원장님과 더불어 인도네시아의 예술세계를 탐방하는 여행이 이루어졌습니다. 눈이 호강하는 날이었지요. 입과 더불어 말입니다.

여행을 마무리하는 전 날, 신부님이 사제관으로 초대를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제관 구경도 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 외로 본당 규모가 컸고 사제관도 널찍했습니다. 한국에서도 맛보기 힘든 보신음식을 먹을 수 있었고 커다란 쇼핑몰 구경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부님 방에서 맥주를 마시며 두 젊은 사제들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젊은 신부님이 열정적으로 사는 모습은 보기에 참으로 흐뭇한 것이었지요.

그리고 오늘 마지막 날, 점심을 먹으며 조용한 식당에 앉아 이 글을 적고 있습니다. 잠시 후에는 미사를 드릴 예정입니다. 이 모든 여행을 마련해주신 분에게 감사 드려야지요. 감사하게도 신부님께서 특별히 초대를 해 주셨습니다.

나날의 특색이 서로 다르고, 만난 사람들이 서로 다르지만 이 모든 것을 꿰뚫는 한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우리의 ‘신앙’입니다. 10일간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여행 동안 하느님은 이 모든 구슬들을 엮어 하나의 묶음으로 만들어 주셨지요. 당신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 여행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따스하게 건낸 초대의 말 한마디가 이루어낸 기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저도 행복했고, 초대해 주신 분도 행복해하는 소박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 선물을 통해서 하느님은 제가 다시 힘을 내어 당신의 말씀을 전하기를 바라고 계신다는 것을 말이지요.

결국 여행인 겁니다. ‘안주함’이 아니지요. 저는 돌아갈 것이고 이곳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이 결국 마찬가지의 여행이지요. 우리는 머무를 수 없고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다만 머무는 동안 주변의 것들을 누리고 즐길 뿐이지요.

좋은 것은 좋은 것대로 나쁜 것은 나쁜 대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누릴 수 있다면 우리의 생은 비교적 성공한 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시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성장하기를 바라시기에 시련을 허락하시지요. 이번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빈틈없이 ‘완벽’하진 않았지만, 통틀어서 볼 때 모든 것은 ‘완전’히 이루어진 셈입니다.

이 모든 것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이번 여행 동안 만난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릴 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하나이며 이 ‘생’이라는 여행을 마치고 나면 훗날 다시 만날 이들입니다. 주님의 축복을 여러분 모두에게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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