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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선언

주님을 두고 오늘 너희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곧 주님께서 너희의 하느님이 되시고, 너희는 그분의 길을 따라 걸으며, 그분의 규정과 계명과 법규들을 지키고, 그분의 말씀을 듣겠다는 것이다. (신명 26,17)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이마에 물을 붓는다는 것이 아니라 세례가 우리에게 전하는 방향을 잘 지키고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말합니다. 유아에게 세례를 주는 이유는 아이의 세례를 원하는 부모가 그 다짐을 대신하고 굳건히 지키겠다고 약속하기에 세례를 주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 선언을 공공연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잊어버렸습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배워 알고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겠다던 약속은 어느덧 바람결에 흩뿌려진 먼지처럼 되고 말았지요.

우리는 더이상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려고 하지 않고 그분의 길을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역할을 하는 수많은 것들이 존재합니다.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주고 노후를 약속하는 수많은 존재들, 그 가운데 핵심은 ‘돈’이고 우리는 돈을 하느님의 자리에 두고 섬기고 있습니다. 돈을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돈이 잘 모이는 곳에 나아가려고 하고 돈을 많이 가진 이를 은근히 존경하고 그들과 같이 되고 싶어합니다. 양심이 바르지만 행색이 초라하면 부끄러워하고 반대로 양심 따위는 어떻든 상관없이 백화점에 가서 수백만원치 쇼핑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을 우러러봅니다. 겉으로는 그들을 비난하는 척 하지만 속으로는 한껏 부러워하고 있지요.

우리는 그분의 규정과 계명과 법규가 무엇인지 잊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우리는 인간이 만든 것을 하느님의 규정으로 삼았고, 인간이 정한 것을 계명과 법규로 삼아 지키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웃은 돌보지 않으면서 사제에게 고급 양주를 사다주는 것을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지요. 유흥비로 수십만원을 쓰면서도 가난한 나라에서 선교하는 사제가 다가오면 제 주머니 돈걱정부터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지겨워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제는 듣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하지만 물어보면 무슨 말을 들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합니다. 오늘 뉴스에 어디에 사고가 나고 어떤 살인이 있었는지는 기억하면서도 주일 강론의 핵심이 뭔지를 기억해내지 못하고 심지어는 방금 들은 복음 말씀의 내용도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느님의 말씀을 뿌리기 위한 텃밭이 아니라 세상의 호기심거리를 채우기 위한 썩은 자루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선언했지만, 빈 말 뿐이었습니다. 이제 하느님은 당신이 약속하신 것을 거두어들이실 것이며 그 날에 우리는 변명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이 글은 필요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부정적인 관점으로 쓰여졌음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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