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마태 6,7)
하느님의 말씀이 진리와 신실함이라면 우리가 하는 말은 ‘공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말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말 속에는 ‘공허’가 가득차 있습니다. 즉, 텅 비어 있다는 말이지요.
텔레비전을 틀어 보십시오. 영상과 더불어 수많은 말들이 뿌려집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정신이 멍해집니다. 왜냐하면 그 말들 속에는 ‘진실함’, ‘선함’과 같은 것들보다는 그들이 바라는 목적들이 가득하기 때문이고 그 목적의 대부분은 ‘이윤’과 관계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제 아무리 유명인사가 나와서 그럴듯한 말을 한다고 해도 결국은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저마다의 이기심이 교묘하게 더해져서 이런 저런 말들을 꺼내놓는 것이지요. 텔레비전은 그야말로 여가를 위해서 적절히 쓰지 않으면 중독되기 쉬운 물건입니다.
이러한 세태에서 우리는 ‘기도’조차도 많은 말로 뒤덮으려고 합니다. 기도의 양을 측정해서 기도의 신실함을 가늠하려고 하지요. 레지오에서 활동 보고로 많은 기도를 꺼내 놓으면 사람들은 놀랍니다. 하지만 그 기도의 ‘진실성’은 전혀 드러나지 않지요.
‘그래도 신부님,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을 뭐라할 순 없잖아요?’
맞습니다. 기도를 아예 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그래도 묵주라도 들고 오랜 시간 앉아있는 사람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적어도 기도 하는 시간 동안에는 다른 활동에 신경쓰지는 못할 것입니다. 적어도 기도 하는 시간 동안에는 ‘죄를 짓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상적인 표현들이 사실은 얼마나 웃긴 이야기인지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를 짓지 않고 기도를 한다니요? 다른 활동을 하지 않고 기도를 한다니요? 기도라는 것의 본질을 ‘땜빵’으로 생각하는 수준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에게 내어바치는 우리 자신을 말합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드러나는 활동으로 ‘기도행위’가 존재하는 것이지요. 묵주를 쥐지 않는다고 기도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정반대로 묵주만 열심히 쥐고 나머지를 엉망으로 보내는 사람도 있지요.
사실 저는 열심하다는 것을 통해서 자신을 과시하는 이들을 여럿 보아 왔습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열심한 신자였지만 실제로는 과시욕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이 보여주는 열심의 증거들 속에서 사실 ‘믿음’을 찾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집안에 귀한 성인상이 있다고 그것이 열심을 드러내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100년 묵은 분재를 자랑하는 사람이나, 멋들어진 수석을 자랑하는 사람과 도대체 무엇이 다를 것입니까?
반대로 저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들에게서 참된 신심을 발견한 적이 많습니다. 거의 파탄이 날 가정 속에서 하느님을 향한 믿음의 끊을 놓지 않는 부녀자에게서 믿음을 보았고,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처지에서 하느님을 향한 희망을 놓지 않는 청년을 만났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세상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을 받고 있었습니다.
많은 말이 믿음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참된 신앙은 가리워져 있고, 가리워져 있어야 마땅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진리와 신실함이라면 우리가 하는 말은 ‘공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말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말 속에는 ‘공허’가 가득차 있습니다. 즉, 텅 비어 있다는 말이지요.
텔레비전을 틀어 보십시오. 영상과 더불어 수많은 말들이 뿌려집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정신이 멍해집니다. 왜냐하면 그 말들 속에는 ‘진실함’, ‘선함’과 같은 것들보다는 그들이 바라는 목적들이 가득하기 때문이고 그 목적의 대부분은 ‘이윤’과 관계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제 아무리 유명인사가 나와서 그럴듯한 말을 한다고 해도 결국은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저마다의 이기심이 교묘하게 더해져서 이런 저런 말들을 꺼내놓는 것이지요. 텔레비전은 그야말로 여가를 위해서 적절히 쓰지 않으면 중독되기 쉬운 물건입니다.
이러한 세태에서 우리는 ‘기도’조차도 많은 말로 뒤덮으려고 합니다. 기도의 양을 측정해서 기도의 신실함을 가늠하려고 하지요. 레지오에서 활동 보고로 많은 기도를 꺼내 놓으면 사람들은 놀랍니다. 하지만 그 기도의 ‘진실성’은 전혀 드러나지 않지요.
‘그래도 신부님,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을 뭐라할 순 없잖아요?’
맞습니다. 기도를 아예 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그래도 묵주라도 들고 오랜 시간 앉아있는 사람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적어도 기도 하는 시간 동안에는 다른 활동에 신경쓰지는 못할 것입니다. 적어도 기도 하는 시간 동안에는 ‘죄를 짓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상적인 표현들이 사실은 얼마나 웃긴 이야기인지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를 짓지 않고 기도를 한다니요? 다른 활동을 하지 않고 기도를 한다니요? 기도라는 것의 본질을 ‘땜빵’으로 생각하는 수준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에게 내어바치는 우리 자신을 말합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드러나는 활동으로 ‘기도행위’가 존재하는 것이지요. 묵주를 쥐지 않는다고 기도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정반대로 묵주만 열심히 쥐고 나머지를 엉망으로 보내는 사람도 있지요.
사실 저는 열심하다는 것을 통해서 자신을 과시하는 이들을 여럿 보아 왔습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열심한 신자였지만 실제로는 과시욕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이 보여주는 열심의 증거들 속에서 사실 ‘믿음’을 찾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집안에 귀한 성인상이 있다고 그것이 열심을 드러내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100년 묵은 분재를 자랑하는 사람이나, 멋들어진 수석을 자랑하는 사람과 도대체 무엇이 다를 것입니까?
반대로 저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들에게서 참된 신심을 발견한 적이 많습니다. 거의 파탄이 날 가정 속에서 하느님을 향한 믿음의 끊을 놓지 않는 부녀자에게서 믿음을 보았고,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처지에서 하느님을 향한 희망을 놓지 않는 청년을 만났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세상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을 받고 있었습니다.
많은 말이 믿음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참된 신앙은 가리워져 있고, 가리워져 있어야 마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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