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어느 틀 안에 살아가면 이내 익숙해져 버려서 자신이 틀 안에 있는 줄을 모르게 됩니다. 우리가 전에는 감사하게 받던 것들을 일상적으로 누리기 시작하면 우리는 어느새 그것을 우리의 ‘권리’로 생각해 버리지요. 그리고 행여라도 다시 예전의 삶을 겪게 되면 그 순간은 ‘불평, 불만’이 가득하게 됩니다.
가난하게 살던 시절, 작은 행복거리들이 있었습니다. 삼촌이 외국에 갔다가 초컬릿이라도 사오면 그것은 행복의 요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음식이 남아도는 요즘, 더 맛깔난 음식이 아니면 행복을 느끼기는 무척이나 힘들어 졌습니다. 그리고 누가 밥을 조금 질게 하거나 하면 겉으로 표현은 하지 않아도 속으로 불만이 가득하지요.
겸손해지기 위해서는 단순히 옛 생각을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겸손의 근본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누리는 것에 감사할 줄 알 때에 내면에 갖추어지는 것입니다. 보다 나은 환경을 추구하는 것을 두고 뭐라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욕구가 현재 누리는 것들의 가치를 퇴색시켜 버린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미 어엿한 집을 가지고도 더 큰 집을 가지기를 원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누리는 것이지만 하느님은 인간이 필요 이상을 원하기 시작하면 깨달음을 주려고 애쓰시는 분이십니다.
겸손과 감사, 그리고 행복은 아주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겸손하지도 감사할 줄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반대로 겸손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삶 자체가 행복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환경적인 요인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사람은 어디에 가나 적응하고 살게 마련입니다. 마음 속에 행복의 씨앗을 심고 싶다면 감사할 거리를 찾고, 우리의 본래의 위치를 너무 높게 잡지 마십시오. 걷지 않고 차를 탈 수 있다는 것에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차가 좀 더 안락하지 못하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가난하게 살던 시절, 작은 행복거리들이 있었습니다. 삼촌이 외국에 갔다가 초컬릿이라도 사오면 그것은 행복의 요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음식이 남아도는 요즘, 더 맛깔난 음식이 아니면 행복을 느끼기는 무척이나 힘들어 졌습니다. 그리고 누가 밥을 조금 질게 하거나 하면 겉으로 표현은 하지 않아도 속으로 불만이 가득하지요.
겸손해지기 위해서는 단순히 옛 생각을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겸손의 근본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누리는 것에 감사할 줄 알 때에 내면에 갖추어지는 것입니다. 보다 나은 환경을 추구하는 것을 두고 뭐라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욕구가 현재 누리는 것들의 가치를 퇴색시켜 버린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미 어엿한 집을 가지고도 더 큰 집을 가지기를 원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누리는 것이지만 하느님은 인간이 필요 이상을 원하기 시작하면 깨달음을 주려고 애쓰시는 분이십니다.
겸손과 감사, 그리고 행복은 아주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겸손하지도 감사할 줄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반대로 겸손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삶 자체가 행복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환경적인 요인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사람은 어디에 가나 적응하고 살게 마련입니다. 마음 속에 행복의 씨앗을 심고 싶다면 감사할 거리를 찾고, 우리의 본래의 위치를 너무 높게 잡지 마십시오. 걷지 않고 차를 탈 수 있다는 것에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차가 좀 더 안락하지 못하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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