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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련된 것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마태 25,34)

하느님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창조하면서 미리 마련해 두신 것이 있습니다. 간단하게 비유로 이야기하면 음식을 담을 그릇과 부가적으로 생산되는 쓰레기를 담을 쓰레기통이었지요. 요리하기 이전의 식재료들은 자신들이 어떤 음식에 사용될지 알지 못합니다. 훌륭한 음식이 될 수도 실패한 쓰레기가 될 수도 있었지요.

하느님이 바란 요리의 제목은 ‘사랑’이었습니다. 레시피는 다음과 같았지요.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마태 25,35-36)

그냥 읽기에는 어렵지 않은 내용입니다. 하지만 실천하기에는 엄청난 ‘자기비움’이 필요한 일이지요. 우리는 우리의 굶주림, 목마름, 나그네됨, 헐벗음, 병, 갇힘에는 민감하지만 타인의 일에는 굉장히 둔감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같은 가족이 곁에서 힘들어해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일이 굉장히 많습니다.

대단한 일이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더욱 놀랄지도 모릅니다. 엄청난 치료약을 개발해서 세상의 중대한 병을 치유하는데에 열과 성을 다했지만 자신의 아내가 암에 걸려 나날이 메말라가는 것을 모르고 있는 상황과 비슷하지요. 치료약의 개발은 그에게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고 그 치료약은 결국 엄청난 가격으로 가난한 이에게는 주어지지도 않으며 결국 자신의 아내는 암으로 죽어 버립니다. 그의 두 손에는 부와 명예가 쥐어져 있지만 그는 그 어떤 ‘선행’의 결실도 얻지 못한 셈입니다. 차라리 자신이 지닌 지식으로 주변의 이웃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더라면, 그리고 자신의 아내를 보살피고 그녀의 병간호를 했었더라면 오히려 세상을 바꾸는 데에 조금이라도 더 나은 도움을 주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명분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을 거부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지금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라고 우겨대면서 자신의 몫의 사랑을 하지 않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애정, 온유, 겸손, 인내와 같은 덕목은 전혀 늘지 않고 아집과 이기심만 가득 느는 셈이지요.

적지 않은 이들이 깜짝 놀랄 것입니다. 자신은 ‘사랑’을 위해 헌신했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위해 헌신한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한 번 더 놀라게 될 이유는 자신이 흐리멍덩하게 생각해 온 ‘하느님’이라는 분이 드높은 권좌에 앉아서 다음과 같은 명을 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마태 2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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