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요한 6,29)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에 대해서 성찰해 봅시다. 우선은 ‘믿음’이라는 행위의 특성을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상적인 행위와는 다른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대상’을 근거로 삼습니다. 우리가 친구를 믿는다고 표현할 때에 그 친구가 입은 옷이나 그 친구가 지닌 재산을 근거로 무언가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우정에 근거한 것이며 그것은 지극히 내적인 것이며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사라질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으니 철떡같이 믿었다가 개떡같이 배반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근거를 두고 그것을 바탕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아예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그의 내면을 분별할 수 있고 결국 믿음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지요. 사람을 믿을 수는 있지만 최종적인 신뢰를 둘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믿음을 둘 분명한 바탕이 될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믿음을 여러가지 것들에 둡니다. 자신이 가진 재산에 믿음을 두는 사람도 있고, 자신이 가진 지위에 믿음을 두는 사람도 있으며, 자신이 가진 명예에 믿음을 두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 하느님이라는 존재를 상실해 가는 것이지요. 하지만 누구든지 잠시만 멈추어 서서 생각을 해 보면 우리가 손쉽게 믿음을 두는 것들이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 것들인지 알 수 있습니다.
재산이라는 것은 결국 사라져 없어버릴 먼지 위에 바탕을 마련하는 것이고, 지위 또는 권력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자신의 힘이 사라질 때에 모조리 없어져 버릴 것이 뻔한 것들을 바탕으로 삼고 믿음을 두는 것이며, 명예라는 것 역시도 헛된 사람들의 인기에 바탕하여 그 위에 믿음을 쌓는 것일 뿐입니다. 결국 영원하지 못하고 모두 사라져버릴 운명을 지닌 것들이지요.
결국 믿음은 ‘영원’을 바탕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밖의 모든 믿음은 배반당하게 되고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영원’을 찾고 그 위에 모든 믿음을 두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영원한 진리’를 얻어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 당신을 만나게 되는 것이지요.
하느님에게 믿음을 둔다는 것은 언뜻 분명한 표현인 것 같지만 사실 흐릿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인간이 알아 들을 만한 표지로 말씀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영원성은 너무나 크고 무한해서 우리에게는 마치 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거대한 지구 위에 발을 딛고 있는 우리이지만 지구는 마치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그것이 너무나 거대해서 우리가 늘 발을 딛고 서 있지만 그것을 인지하지는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의 외아들을 인간으로 보내셨습니다. 당신의 영원한 말씀, 알파이요 오메가이며 시작이며 끝이신 분을 우리에게 보내셨지요. 그리고 우리가 구체적으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행적을 바라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믿고 사랑할 수 있게 하신 것이지요.
따라서 이제는 문제가 ‘예수님’으로 넘어오게 됩니다. 믿음을 두고 싶고 그 대상을 물색하고 싶은데 우리 앞에 ‘예수님’이라는 분이 서 있는 것입니다. 역사 안에 분명히 존재한 분으로, 실제로 살아계신 분으로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곤란함을 겪게 됩니다. 2000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난 이에게 믿음을 둔다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닌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를 돕기 위해서 당신의 ’교회’를 남기셨습니다. 사람들이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예수님 당신을 느낄 수 있게 그분을 따르는 교회를 남기신 것이지요. 그래서 교회는 그 사명을 이어받아 세상 사람들 앞에 하나의 표지판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구성원들인 우리의 사명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표지판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 말인즉슨 예수님을 드러내고 그분의 말씀과 삶을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랑하게 하고, 또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모든 믿음과 희망을 두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진행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을 맡게 되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이 일 사이에 끼어서 일을 방해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지 모르는 사람이지요. 교회는 선발된 이들이며 세상 사람들 앞에 하느님을 드러내어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하느님은 사람들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분이시지요.
얼마나 많은 불평들이 신자들 자신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지 모릅니다. 신앙생활이 힘들다고 합니다.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으니 십자가를 져야 하고, 그 십자가는 원래 힘이 들도록 제작된 것입니다. 힘들지 않으면 십자가가 아닌 셈이지요. 우리는 십자가를 지면서 도리어 기뻐해야 할 마당에 불평을 쏟아놓고 십자가를 내려 놓으려고 애를 쓰는 셈입니다. 믿음을 지닌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니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예수님을 찾을 리가 만무합니다. 역으로 비판하고 비난하기 일쑤이지요.
믿음에는 반드시 상급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지요. 그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과 갈망이 흐릿하니 당연히 십자가가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가 무겁다고 투덜대는 사람은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삶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힘들다고 하다가 결국 금송아지상을 세우고 거기에 경배하고 말았지요. 그 금송아지상이 당장 자신들에게 비를 내리고 복된 삶을 보장하기라도 하는 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일들이 신자들 사이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믿어야 합니다. 그분을 믿기 시작할 때에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고,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할 때에 영원한 생명에 합당한 이들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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