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요한 13,20)
가끔 미사 때에 농담처럼 솔직하게 이런 말을 합니다.
“여러분, 제가 왜 이러고 있을까요? 왜 제가 이 머나먼 땅에 와서 말도 문화도 다른데 그것을 극복한다고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이러고 있는 걸까요? 저도 좋은 아가씨 만나서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었을 텐데 왜 이러고 있는 걸까요? 그리고 이 미사만 해도 그렇습니다. 왜 저는 이토록 여러분들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고 기를 쓰는 걸까요? 얼마든지 최소한의 의무만 하고도 살 수 있을텐데 말이지요. 그 최소한의 의무마저 하지 않으면 주교님이 저를 쫓아내실테니까 최소한도로 일은 하겠지요. 즉 미사만 재빨리 드리고 얼른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하고 미사 이외의 시간은 내 책임이 아니라며 내칠 수 있겠지요. 누가 찾아와서 면담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과외의 일이라며 거절하고, 미사 뒤의 성사도 얼른얼른 최소한 주고 말아 버릴 수도 있겠지요. 헌데 왜 저는 이렇게 강론에 힘을 쏟고 미사가 끝나도 찾아오는 사람을 만나서 도움을 주고자 애를 쓰는 걸까요?”
그러면 사람들이 호기심 있는 표정으로 저를 쳐다봅니다. 정말 왜 저 눈이 찢어진 동양인 사제가 저러고 있을까 궁금하니까요. 그러면 그때서야 대답을 합니다. 뒤에 계신 분(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가리키면서 말이지요.
“바로 저분 때문입니다. 저분이 이 일을 시작하셨고 이 일을 절더러 하라 하시니 그 일을 하는 것 뿐입니다. 저 분이 아니면 제가 이 일을 계속할 그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저 분을 받아들여서 저와 함께 이 일을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만나서 열심히 가르침을 전합니다. 하지만 아직 세상에는 예수님을 모르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보살펴야 하는 몫은 바로 여러분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만 살겠다는 이기적인 구원관에 빠져 있지 말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을 단순히 성경책을 들고 가서 지루한 설교를 하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빛이 된다는 것이고 그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이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여러분이 빛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안의 어두움을 없애고 삶을 올바른 길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여러분의 행실을 보고 하느님에게로 나아오는 것이지요. 아버지는 선하고 책임감 있는 아버지가 되어야 하고 어머니는 신실하고 다정한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자녀들은 순종하는 자녀들이 되어야 하고 어르신들은 지혜가 있는 어르신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길입니다.”
몇 번이고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물론 제 목소리가 얼마나 퍼져 나갈지는 모르겠습니다. 고함을 지른다고 퍼질 내용이 아니지요. 사람들이 공감을 하고 직접 살아 나가야 퍼지는 내용입니다.
모쪼록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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