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요한 12,44-45)
신앙 안에 다른 두 빛이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오직 한 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에게서 오는 이는 그분을 알아봅니다. 왜냐하면 같은 성질의 빛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은 시각정보를 받아들이고 귀는 음성정보를 받아들입니다. 귀가 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눈이 들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사람이 세상의 것들에 반응하지 않고 또 지상의 사람이 하느님의 것에 반응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우리가 지상의 사람에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건너가는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늘 ‘약점’이 존재합니다. 유혹에 시달리는 것이지요. 유혹은 육의 인간을 바탕으로 하고 그것을 통해서 영의 인간을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악마는 언제나 ‘유혹’을 통해서 인간을 꾀어내어 그를 속이고 죽이고 멸망시키려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반대로 영의 인간은 영의 목소리를 찾아서 자신을 드높입니다. 영은 영의 목소리를 알아보기 때문에 그것을 들을 때에 귀가 솔깃해지고 마음이 이끌리게 되며 그 소리를 따라 걸어가게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목소리, 즉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는 언제나 이 두가지가 내면에서 작용을 합니다. 그리고 그 다툼에 힘을 실어 주는 것은 바로 우리의 ‘자유의지’입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는 그 양자 한가운데에 서서 ‘결정’을 하는 것이지요.
만일 같은 일을 한다고 믿는 두 사람이 일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뭔가가 충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충돌은 절대로 영의 빛에서 내려올 수 없습니다. 반대로 육의 대상이 충돌을 하는 것이지요. 즉, 육이 영과 충돌을 하던가, 아니면 양측의 육적인 면이 서로 일치하지 못하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정말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을 하게 되면 그는 같은 일을 하는 이들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반대로 자신의 야욕을 위해 일하는 이들의 시기와 증오를 겪게 되지요. 그것이 예수님의 운명이었고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운명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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