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요한 6,66)
사실 뭔가 새로운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예비되어 있던 일이 때가 되어 일어났을 뿐입니다.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어둠은 어둠을 사랑할 뿐입니다. 그래서 빛이 온전히 드러났을 때에 어둠은 빛으로 변모하지 못하고 더 큰 어두움으로 돌아설 뿐입니다.
성당에 나온다고 모두가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때가 되면 사람은 결정을 하게 되고 하느님을 따르던지 아니면 세상에 남던지 하게 됩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사람이 있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보면 그분의 외모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거기에 매력을 느낄 수도 있지요. 또 그분의 행위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분이 하는 일에 매력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겉모습과 행위와 더불어 드러나는 그분의 핵심적 가르침을 접하게 되었을 때에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아야 할지를 분명히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겉으로 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가장 깊은 양심의 영역은 전혀 건드리지 않고 외적으로 신앙생활, 아니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고상하게 성전에 들어가서 고요를 즐기고 나와서는 우아하게 사람들과 어울리고 때로는 봉사 활동까지 참여하지만 근본의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함부로 내려놓지는 못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결정적인 때가 되면 가면을 벗게 됩니다.
과연 신앙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한 표현이지만 현실에 부딪히게 되었을 때에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원수마저도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소한 용서조차도 하지 못하는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결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 본질적 의미로 이해하고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무의미한 줄다리기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고 우리는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 한계가 가득한 인간이니까요.
하느님이 ‘이제 그만’ 하시면 우리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야 합니다. 하지만 어디로 가게 될까요? 그것은 우리가 지상의 생에서 무엇을 위해서 헌신했나 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른 이라면 당신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고, 반대로 그분의 뜻에 어긋나게 살아온 이라면 전혀 다른 곳에 머무르겠지요.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사울은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따른다는 그 방식이 행여 예수님의 자비로운 마음과는 전혀 다른 것이 아닌지 잘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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