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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버리는 것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묵시 21,4)

죽음이라는 것은 육신의 생명이 끝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을 육신이 없어지게 되면 당연 죽음도 없어지게 되겠지요. 인간은 원래 멸망할 운명을 타고 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로 인해서 죽음이 들어온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시고 나면 다시는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게 될 것입니다.

영혼은 죽지 않습니다. 영혼은 죽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혼은 전혀 다른 의미의 ‘죽음’이 존재합니다. 영혼에게는 하느님을 잃는 것이 곧 죽음입니다. 육신이 음식이 끊어지고 물이 끊어지면 서서히 죽어가듯이 영혼도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나면 서서히 죽은 상태로 변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적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요. 몸이 죽고 나면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듯이 영혼도 죽고 나면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게 됩니다. 영혼의 본래의 기능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죽은 영혼은 사랑할 줄을 모르게 됩니다.

사랑에 대해서 많은 이들은 오해를 합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사랑의 근원이시고 그 사랑을 외아들 예수님께서 몸소 가르쳐 주셨습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임으로써 사랑을 이루셨지요. 사람들은 이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마저도 자기들 중에 누가 더 높은가로 다투곤 했지요. 사람들은 자기만 사랑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하느님처럼 사랑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고 사랑을 가르쳐 주셨지요.

인류의 역사는 계속되지만 사랑의 역사는 각 개개인마다 이루어집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사랑’을 배우고 영원에 건너가게 됩니다. 물론 배움을 잘 마친 이들은 그 사랑을 바탕으로 행복 안에서 살아갈 것이고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배우지 못한 이들은 미움과 증오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묵시록은 마지막 때를 다루고 있습니다. 인류에게 메세지를 건네고 있지요. 그 메세지는 늘 두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하나는 희망과 기쁨의 메세지이고 다른 하나는 경고의 메세지입니다. 믿음 안에서 인내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희망과 기쁨이고 제 욕심만 찾는 이들에게는 경고가 됩니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묵시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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