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먼저는 일깨움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어느 구석에서 놀고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새 옷을 입혀준 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새 옷을 입자 마자 다시 자신이 있는 더러운 곳에서 더럽혀 버리고 말 터인데요. 가장 먼저는 지금 머무르는 곳의 상황이 어떤 것이며 그것이 어떤 해악을 끼칠 수 있는지 그가 깨달을 수 있도록 충분히 알려 주어야 합니다.
동시에 희망을 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상태의 심각성을 강조하다 보면 사람이 헤어날 길을 찾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가 희망을 잃지 않도록 빛을 비추어 주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면 비로소 그가 스스로 선택할 기반이 생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비참한 상태에 대해서 알고 그리고 희망의 빛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에 그는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본인의 ‘회개’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다음 단계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적절한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면서도 죄악에 머무르기를 고집하게 된다면 그는 이전보다 더욱 심각한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전에는 몰라서 그릇됨에 머물러 있었지만 이제는 알면서도 그릇됨에 머물러 있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이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억지로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는 사람도 보게 됩니다. 그는 매서운 야수와 같이 ‘정보’를 취득하려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그것을 실행할 마음도 없으면서 배우기만 하려는 것이지요. 그는 교만에 잔뜩 부푼 사람에 불과합니다. 자신이 배운 것들을 바탕으로 더욱 더 교만해 질 뿐이지요.
회개가 이루어지고 나면 그에게는 진보에 필요한 수단들이 요구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계별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초등학생이 대학 교육 과정을 배울 수는 없습니다. 예컨대 아직 인내도 없는 이가 용서를 배울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용서는 기술이 아니라 인내를 바탕으로 지혜와 사랑을 통해서 이르는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지도자는 따라서 무척 신중하게 식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식별을 위해서 영적 지도를 받는 이는 영적 지도자를 신뢰하고 내어맡길 필요가 있지요.
하지만 이 과정에서 또다시 교만이 끼어듭니다. 자신을 남보다 낫다고 간주하는 이 마음은 아무것도 진행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를 회개 이전의 가장 최악의 상태보다도 더 심각한 상태로 만들어버리고 맙니다. 교만이 한 인간을 지배하기 시작하면 그에게는 그 어떤 것도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겸손이라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덕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도라는 것은 이 모든 과정에 꾸준히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의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인간의 기술의 산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매 순간 충실히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다만 기도는 양이 아니라 질입니다. 수많은 말마디나 외적인 행동이 기도의 질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질은 진실한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언뜻 복잡해 보이는 내용이지만 하느님의 자녀들에게는 이것이 이론이 아니라 실제의 삶이기 때문에 그저 지금 가는 길을 꾸준히 걸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배운 바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많이 욕심내지 않고 그저 자신의 다음 단계를 바라보고 앞으로 정진할 뿐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시작하지 않은 채로 호기심에 잔뜩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이 등장할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으면서 남의 눈에 티끌이 들었다고 비난하려고 독이 잔뜩 올라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 역시도 하느님에게는 그분의 자비 안에서 구원의 대상이 되지만 정작 그 자비를 내치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바로 그들 자신들입니다. 그들의 죄악과 교만이 자신들을 장님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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