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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리를 신뢰하는 것



“신부님, 제 동생이 가스불을 켜다가 온통 얼굴을 태웠어요. 불을 붙이는데 이미 가스가 가득차 있었던 걸 몰랐대요.”

오늘 저를 찾아온 한 어머니 교사가 울면서 시작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휴대폰에 사진을 보여줍니다. 정말이지 온 얼굴이 새카맣게 타버렸습니다.

“자매님, 모든 일에는 그 의미가 있어요.”

“맞아요. 신부님. 신부님을 통해서 많이 배우고 있어요. 그리고 이 일에도 의미가 있다는 걸 알아요. 사실 제 동생은 그렇게 뜯어 말리는데도 술을 엄청 마셔대었지요. 가정에 불화도 있구요.”

“자매님, 세상 일을 모조리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모든 것에는 그 원인과 결과가 있는 법이에요. 모쪼록 자매님을 통해서 집안 사람들이 하느님을 배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래요. 아마 사람들이 변해가는 과정이 굉장히 더딜 거에요. 하지만 열심히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래요. 누군가에게는 변화가 급작스럽게 닥치고 또 누군가에게는 그 변화가 서서히 이루어져요. 그리고 누군가는 여러번의 시련을 겪어야 올바른 길로 돌아오는 사람도 있어요.”

“네, 아마 동생도 이번 일을 통해서 많은 걸 깨달았을 거에요.”

대화를 마칠 즈음에 이미 자매는 안정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저라고 모든 대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당황스러운 일은 당황스럽고 안타까운 일은 안타까운 법이지요. 하지만 오직 하나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을 뿐입니다. 그 어떤 슬프고 충격적이고 괴로운 일이 일어나도 하느님은 왜 그렇게 되는 것인지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하느님의 섭리를 신뢰하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한의 최대한의 노력을 하는 것 뿐이지요. 그것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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