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사건 이후에 제자들은 다시 옛 삶으로 돌아갑니다. 목자를 잃은 양떼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법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자신의 본능이 이끄는 대로 나아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목자는 다시 다가왔고 그들이 하는 일을 방해하지 않고 도리어 도와줍니다. 목자는 제자들이 그분을 알아보게 만들고 스스로 다가오게 만듭니다.
가장 사랑이 깊은 요한이 그분을 알아보았고, 그 사실을 전해들은 교회의 우두머리리인 베드로가 주저하지 않고 물에 뛰어듭니다. 존경과 예의를 표현하는 겉옷과 함께 말이지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실천하여 엄청난 고기를 잡게 됩니다. 고기가 엄청나면 그물이 찢어질 법도 한데 그물은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상을 차려 두셨고 제자들이 잡아 온 것을 거기에 보태라고 명하십니다. 우리는 이미 차려진 상에 우리의 노력을 보태는 것 뿐입니다. 모든 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마련해 두신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그분이 누구신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주시는 빵을 순순히 받아 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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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배우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예수님과 교회를 사랑하게 됩니다. 하지만 머지 않아 수난과 십자가가 다가옵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신앙인들은 그 십자가의 무게에 짓눌려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러나 목자는 그들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을 방해하지 않고 그들에게 다가옵니다. 그들의 일상 안에서 그들이 목자를 알아볼 표를 남겨두게 됩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는 예수님의 말씀의 흔적을 체험할 일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우리가 옛 기억을 올바로 떠올리기만 하면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 과연 무엇인지 올바로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으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겉옷을 챙겨 입고 물에 뛰어 들었습니다. 사랑의 식별이 있고 뒤이어 교회의 실천이 있는 것입니다. 살아내지 않는 신앙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살아내는 것은 바로 교회의 역할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교회를 멀리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제자들은 실로 엄청난 고기를 잡게 되고, 우리도 착실한 신앙생활 안에서 예전의 삶보다 더 많은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또한 무한한 열매도 얻게 되지요. 이 열매는 세상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영혼들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 안에서 움직이기 시작할 대에 우리는 엄청난 열매들, 영혼들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이 모든 것이 예수님께서 미리 마련해 두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단지 그분이 미리 다 준비해 놓으신 것에 약간의 힘을 보태는 것 뿐입니다. 우리가 잘나서 한 게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초대해 주셔서 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이 정도 되면 우리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특히 빵을 나눌 때에, 즉 우리가 거룩한 미사에 참례할 때에 우리는 주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 빵을 축복하라고 보내신 부족한 사제가 아니라 그 빵 자체, 하느님의 어린 양, 주님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묵묵히 그 빵을 받아 먹습니다. 바로 이 때에 모든 의심이 사라지고 비로소 진정한 신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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